Dear Lady

part. 2

(주은찬 x 청가람)

 

 

 

 

  뒤는 굳이 나열하여 줄줄 설명하지 않아도 뻔했다. 나는 엉망진창이 된 집을 대강 정리하고, 너는 흑색의 마스카라와 쉐도우가 뭉쳐 눈 아래까지 잔뜩 번져있는 얼굴을 씻고 오겠다며 작은 욕실 같지도 않은 욕실로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던 참이었다. 내가 무릎을 굽히고 쓰레받기로 바닥을 쓸고 있을 때 고개를 돌리자마자 무엇인지 딱 알수 있을정도로 선명한 허연 액체들이 늘러 붙어 있는 너의 다리와, 그 위로 덮인 짧은 스커트가 눈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시선을 재빨리 다른 곳으로 돌려왔다. 딱히 눈길을 돌려 저 모습을 눈에 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말끔하게 얼굴을 씻고 반소매 하나와 반바지를 걸치고 나온 너는 수건으로 머리의 젖은 물기를 닦은 후에 낡은 화장대 앞에 엉덩이를 털썩 붙이고 앉았다. 서랍에서 길쭉한 검은색 드라이기를 익숙하게 꺼낸 후에 너는 코드를 꽂다 말고 멍하니 거울 안의 너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깊게 일렁이는 두 붉은 눈동자로, 반대편에 비친 너의 얼굴을 꾸준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게 너는 몇 분을 보냈다. 그 사이에 나는 장롱을 뒤지며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이불을 말끔하게 청소한 바닥에 베개와 함께 내려놓았다. 바닥이 꽤나 차가운 것 같아 튼 지 오래 돼 보이는 보일러도 틀었다. 시간이 조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드문드문 차가운 부분이 있어 손을 대보는 나에게 가만히 의자에만 앉아있던 너는, 그제서야 여기 보일러 잘 안돼서 연탄떼야되. 라는 말을 익숙하게 건네왔다. 잠시 눈을 깜박이며 너의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머리를 말리고 의자에서 기어코 내려온 너의 행동에 코를 괜히 문질렀다.

 

  미적지근한 요 위에 우리는 나란히 등을 돌리고 누웠다. 춥지도 않은 듯 반팔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너는 반대편을 등지고 누워있었다. 또다시 생각에 잠겨 차가운 벽의 모서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너의 쪽으로 몸을 돌려왔다. 너의 작은 두 어깨가 시야에 들어오고, 나도 모르게 추울 것만 같아서 허리께까지만 덮여있는 담요를 손을 뻗어 끌어당겨주었다. 잠시 움찔 움직이는 너의 어깨를 은근슬쩍 손으로 감싸보다가, 다시 손을 제자리로 가만히 내려놓았다.

 

 

  "주은찬,"

 

 

  순간 너의 몸이 내 쪽으로 돌아오는 동시에 너는 너무나도 익숙한 내 이름 세 글자를 불러왔다. 좁은 창문으로 쏟아지는 달빛에 내비치는 너의 얼굴은 정말이지 '청가람' 너 자체여서 숨이 턱 막혀왔다. 속쌍꺼풀을 지닌 또렷한 두 눈은 너의 눈이었고, 한 번쯤 쓰다듬어보고 싶은 하얀 피부도 너의 피부였으며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맨 입술도 너의 입술이었다. 나도 모르게 생각해버린 마음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너의 물음에 조용히 응, 이라며 조심스럽게 대답을 해왔다.

 

 

  "왜 하필 나야?"

 

 

  너의 깊은 두 눈동자 안에는 나의 얼굴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너는 딱히 화가 나서 물어보는 것 같지도 않았고, 따지듯이 묻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너는 정말 '궁금했던 점'  자체를 묻는 것이었다. 그 속 안에 비친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꿀벙어리가 되어서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그냥."

 

 

  고민하고 고민해서 나온 정답이었다. 할 말은 이것뿐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정말, 그냥."

 

 

  너에게로부터 희미하게 풍기는 담배냄새가 우습게도 기분이 불쾌하지 않아서, 입안으로 타들어 가는 뒷말을 입안에서 연신 삼켜버릴 뿐이었다.

 

 

 

 

  얼마나 잠에 취해있었던 건지, 두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산 중턱에 걸릴 만큼 작은 창문으로는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너는 어제 내가 너의 등에 걸쳐준 점퍼를 입은 채 티비에 시선이 쏠려있었다. 머리에는 까치집을 하나 만들고, 쪼그려 앉아 컵라면을 두 손에 들고 멍하니 시선을 빼앗긴 너였다. 벽에 등을 기대고 정신을 티비속으로 들여보낸 너는, 내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에서 깬듯한 기척을 내자 잠시 시선을 돌리더니 그제야 나에게로 눈을 치켜들며 재빨리 흘겨왔다.

 

 

  "뭐 그렇게 오래 자니?"

 

 

  말끝은 톡톡 쏘는 말투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방금 잠에서 깨어나 비몽사몽 해 정신이 없는 나에게 물컵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마시고 정신 차려, 얼떨결에 한 손으로 물컵을 건네받고, 투명하게 찰랑거리는 맑은 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기다 독 탄 거 아니지? 너, 그냥 죽어. 장난스럽게 말을 꺼낸 나에게 너는 손을 뻗으며 신경질적인 얼굴로 다시 내놓으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나는 너의 반응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조금 익숙하지 않은 사실을 깨닫고 너를 향해 다시 한 번 웃어 보였다. 본의 아니게 이 모습이 너의 앞에서 처음 웃는 모습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불을 끌어당겨 무릎에 덮고 너의 옆에 앉아 티비를 시청하며 마지막 하나 남은 컵라면을 입에 털어 넣었다. 무슨 생각으로 방송을 시청했는지, 이따금 예능에서 웃긴 장면이 나올 때마다 아이처럼 살짝 웃음을 짓는 너를 의식해서 전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사실 티비 대신 너를 시청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능이 끝났을 때 즈음 너는 리모컨으로 티비를 끄고, 텅 빈 컵라면 컵을 쓰레기통을 향해 골인한 후 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뒤에서 물끄러미 너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입을 열고 너를 불러왔다.

 

 

  "가람아,"

 

 

  너는 나의 부름에 상냥하게도 바로 뒤를 돌아 바라봐 주었다. 항상 봐왔던 너의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와서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결코 쌀쌀하지 않은 대답으로 대꾸를 해주는 너에게, 나는 아까부터 달싹이던 입을 열어왔다.

 

 

  "학교는?"

 

 

  너는 두 단어를 듣자마자 지겹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잘못된 질문을 골랐구나, 하며 후회하고 있을 때 즈음 한참이나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너는 기어이 헛웃음을 치며 대답을 해왔다.

 

 

  "다 끝난 거 이제 와서 뭐해."

 

 

  정말이지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얼굴이어서, 나는 차마 너에게 더 이상의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조금 더 쉬운 일이었다. 서로에게 암묵적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조용히 있었던 침묵의 약속을 깨트리고, 나는 너에게 질문을 건네면 너는 잠시 고민하며 답변을 해주었다. 너는 이렇게 나에게 이야기를 조금씩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주제는 어제와 비슷했다. 너무나도 덤덤하게 이야기를 꺼내와서, 나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작아 보이는 너의 어깨를 금방이라도 끌어당길 뻔한 욕구를 애써 삭혀왔다. 나는 조용히 숨을 죽이며, 너가 나에게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는 이야기들을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따금씩 분노에 차올라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속사정을 토해내거나 할 때면, 나는 너를 조용히 다독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너와 나는 닮은 점이 꽤나 많이 있었다. 너의 마음속 안에는 서로 얽히고 얽힌 커다란 성이 가득 메꾸고 있었다. 분노가 끌어 올라서 입 밖으로 꾸역꾸역 되올라오는 것을 너는 애써 막고 있을 뿐이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었다. 우스운 건 너는 딱히 나에게 감성팔이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대로의 사실을 그저 말해주는 것뿐인데도 이렇게 속이 아파졌다. 그저 나는 조용히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즈음 나는 차마 참지 못하고 너를 한번 더 끌어당겨 품에 안아왔다.

 

 

  "힘들었지."

 

 

  너의 귓가에 얼굴을 기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너를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를 만난 지 겨우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란 아이에게 무척이나 깊은 동질감이 들어서 괜스레 마음이 쓰라려 왔다. 너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안겨있을 뿐이었다. 너의 목선을 타고 떨어지는 머릿결에서, 기분 좋은 샴푸냄새가 정신이 빠질 정도로 주변을 맴돌았다.

 

 

 

 

  며칠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얘기해보자면, 너는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을 싸그리 부정해버리는 듯 나로부터 자취를 완전히 감춰버렸다. 너의 존재를 내 기억 속에 지워버리려는 듯한 모습이 나를 꽤나 아프게 했다. 새벽에 잠이 들은 내 몸 위로 담요를 덮어주고, 어젯밤까지만 해도 화장대 위에 나열돼있던 물건들이 재가되어 날아간 듯 완벽하게 사라진 모습을 본 나는 조금 쓴웃음을 지었다. 이 집, 계약 끝났어. 계속 살든 나가든 너 알아서 해.

 

  먼지 하나 없는 서랍을 손으로 쓸어보다가, 문득 어두운 새벽 자고 있는 내 귓가에 속삭이고는 사라져버린 너가 불현듯 떠올랐다.

 

 

  "잘 지내, 안녕."

 

 

  그 위에 곱게 올려져 있던 작은 쪽지 하나 때문에 떠나지 않는 나의 갈증이 더욱 치솟았는지도.

 

 

 

 

  그 뒤로는 놀랍게도 눈 깜짝할 사이에 오랜 시간이 흘렀다. 미련이 남는 마음에 너가 혹시나 돌아오지는 않을까 너의 집에서 며칠 밤을 더 묵었지만, 이 집의 주인인지 심술궂게 생긴 노인이 아침에 문을 따고 들어와 나를 내쫓음으로써 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은 한층 수그러들었다.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집으로 돌아가고도, 나는 너를 찾으러 한참이나 헤매다녔다. 하지만 너는 나와 지독한 숨바꼭질을 하는 듯 서운하게도 내 눈앞에 단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적어도 내 앞가림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학교에 다니다가도, 아이들의 대화에서 간혹 나오는 너의 이름이 들려오면 나는 그때만큼은 귀 기울여 훔쳐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 과장되고 헛된 소문들뿐이었다. 동네 주변에 있는 개천 근처에서 벤치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는 너의 모습을 봤다는 둥, 한 남학생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살했는데 그게 너 라는둥, 중년의 남자 손을 붙들고 모텔촌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꼴렸다는 둥 정말 셀 수 없는 저열한 헛소리들이 너무 많이 들려와서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물론 그중에 루머가 아닌 진실도 섞여 있을 터라도 다른 사람 얘기하기 좋아하는 종족 특성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생각했다. 이 모든 소문의 근원은 너가 무단결석으로 인해 퇴학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떠돌기 시작하면서부터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상에 비스듬히 엎드린 채 그 무리를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그 날도 항상 똑같이 흘러가는 날들 중 하루에 불과했다. 점심시간 매점에서 사 온 메론빵으로 대충 허기를 채우고 책상에 엎드릴 때 즈음, 그 무리는 또다시 너를 주제로 반찬 삼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냐, 우리 어제 청가람 본 거 진짜 맞다니까."

  "걔 아니라고, 병신아."

 

 

  뭘 그렇게 열띠게 토론을 하는지, 이제는 몰래 귀 기울여 듣는 것도 습관이 돼버린 나 자신을 문득 발견했다. 그리고 오늘은 정말이지 뭔가 정말 '소문'이 아닌 '진실'을 말하고 있는듯한 느낌에 나는 한층 더 집중 하기 시작했다.

 

 

  "청가람은 갈색 머린데 어제 걔는 진짜 흑발이었어. 거기다가 머리가 짧았다고."

  "아니, 그거 빼고는 키도 똑같고 얼굴도 똑같았다니까? 걔 살아있는 거 맞아."

  "근데 걔가 무용학원에서 나왔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 새끼야??"

 

 

  나는 엎드려있던 책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인상이 꽤나 험악하게 생긴 남자애가 다른 아이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확신했다. 너가 맞는 것 같아. 기분이 꼭 너가 맞는 것 같아. 나는 의자를 뒤로 빼고 몸을 일으켜 세워 무리로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가 오는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떠들던 무리는 한참이나 그 주체가 너가 아닌지 맞는지에 관한 토론을 계속 이어갈 뿐이었다. 나는 두 눈을 두어 번 깜박이고, 조용히 무리의 어깨에 손을 얹어왔다. 온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고, 당황해 하는 무리에게 나는 서슴없이 질문을 내던졌다.

 

 

  "그 학원 주소, 나도 좀 알 수 있을까?"

 

 

 

 

  딱히 그곳에서 너를 볼 수 있다는 기대를 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무리가 말한 사람이 너였으면 하는 희망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단 하루도 너에 대한 생각을 거른 적이 없었다. 조용한 교실 안에서 책상에 앉아 텅 비어있는 너의 자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너의 몸에서 미세하게 풍기는 쌉싸름한 담배냄새가 코끝을 맴도는 것 같기도 했고, 너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머릿결에서 나는 샴푸냄새가 흐르는 듯도 했다. 

 

  방과 후, 나는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무리가 말해준 학원의 위치로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혹시 너가 아니면 어떡하지? 네가 맞더라도 싫어하지는 않을까, 또다시 나로부터 도망가버리지는 않을까. 나 혼자서 설레발을 치며 앞서 나가는 것 같아서 스스로 자책하기도 하고, 또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너를 내 눈앞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모든 것이 모순덩어리라고 생각했다.

 

  무리에게 건네 들은 주소의 건물은 꽤나 낡은 건물이었다. 건물 벽에 간판이 달린 것을 보고 난 후에 안으로 들어가자 고장 난 엘레베이터와 계단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잠시 답지 않게 머뭇거리다가,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걸어 올라갈 때마다 울리는 운동화의 터벅터벅 거리는 소리가 웃기게도 무척 낯설게 들려왔다.

 

  기어이 문 앞에 다다라서는, 애꿎은 문 손잡이를 연신 잡고 쥐었다 폈다를 몇 어번 반복했다. 안에서 흘러들어오는 노랫소리에 나는 문을 천천히 열고 틈새로 시선을 던졌다. 안에는 끝의 창문으로부터 햇빛이 들어오는 긴 복도가 늘어져 있었고, 가장자리로 몇 개의 방들이 있는 걸 보아 아마 연습실인듯싶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차가운 복도의 기운이 발끝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살펴보니 몇몇 방은 불이 꺼져 있었고, 오직 복도 왼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방만 창문으로부터 환하게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괜스레 불어오는 추위에 몸이 떨려와서, 교복 마이 주머니로 두 손을 찔러넣었다. 점점 끝에 위치해 있는 방과 가까워질수록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가서 마치 귓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어찌나 긴 복도였는지, 경직된 어깨를 벽에 가만히 기대고 문에 있는 작은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누구니?"

 

 

  처음 들어보는 낯선 목소리의 남자가 내 뒤편에 서 있는 것을 이제서야 눈치채고는 뒤를 돌아 벽을 짚고 뒷걸음질 쳐버렸다. 장발의 검은 머리를 반쯤 질끈 묶고, 거치적거리는 듯 앞머리를 왼쪽으로 넘겨버린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는 나를 꽤나 의미심장한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찾는 사람이 있는 거야?"

 

 

  딱 봐도 나의 또래처럼 보이지 않는 그 남자는, 익숙하게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나는 잠시 이곳에 무슨 목적을 가지고 왔는지 기억도 못한 채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답변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무슨 말을 해올까 웃기게도 꽤나 겁을 먹어서, 그 남자를 지나치며 급하게 걸어왔던 어두운 복도의 입구를 향해 정신없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 나왔다. 

 

 

  "......"

 

 

  그리고 내 두 귀가 틀리지 않았더라면 그 남자는 내가 훔쳐보려 한 방문을 열면서,

 

 

  "가람아, 너 찾는 사람이 있는가 본데."

 

 

  ,라고 말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기 시작했다.

 

 

 

 

  생각외로 너란 존재는 나와 꽤나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허탈했다. 하지만 너가 아주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나 마찬가지여서, 한편으로는 마음 한쪽이 놓이기도 하였다. 당연하게도 너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은 듯 보였다. 아마 내 존재를 이미 잊어버렸을지도. 너와 처음 만난 날로부터 아주 많은 세월이 흘러서, 벌써 우리가 졸업을 맞이하는 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왔으니 말이다.

 

  너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모르는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너의 이름을 들은 후로는, 더이상 그 학원을 다시 찾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간혹 네가 눈앞에 아른거려 보고 싶어지는 날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너가 있는 건물 앞까지 걸어갔다가, 우습게도 항상 뒤돌기 일쑤였다. 어떤 운수 좋은 날은, 저번에 마주친 키 큰 남자와 함께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목선을 타고 떨어지는 긴 머리를 짧게 치고, 흑발로 염색한 너의 소문으로만 듣던 새로운 모습은 나로부터 시선을 떨어뜨리지 못하게 만들곤 했다. 또한 웃기게도 애써 외면하려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했던 그 남자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너의 모습에 괜스레 안심이 되었다. 아마 너가 이 사실을 알면 마음껏 비웃어주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생각보다 겁이 꽤 많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 같았다. 한 발짝 앞서면 어떻게든 결말을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서 연신 맴돌 뿐이었다. 과거의 당돌함은 어디로 증발해버렸는지 놀라울 만큼 나는 나아갈 수 없는 벽 안에 갇혀있었다. 그렇게 나는 너를 멀리서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나 확실한 건 너가 더이상 내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르는 중년의 손을 붙잡고 걸어간다든가, 어울리지 않는 짧은 치마를 입고 짙은 화장을 한다든가. 그래서 마음이 놓였다. 그 남자라면, 너를

올바른 길을 안내해줄 수 있겠지, 하고.

 

 

 

 

  그리고 그날은, 우습게도 다른 날과 같이 아주 평범한 날이여서 더 잔잔히 흘러갔던 것 같다. 벌써 계절은 한겨울에 접어들어 조금만 밖에 있어도 손이 꽁꽁 얼어버리는 추위가 주변을 감싸 안았다. 관심은 없었지만 나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싹 집중해 공부한 탓에 수능 성적은 그럭저럭 괜찮게 받았고, 담임 말로 표현하자면 '내가 가지 못할 대학'중 하나에 운 좋게 합격하여 입학하게 되었다. 새삼스럽게도 이 모든 사건의 사이에 너가 없다는 사실이 꽤나 이제는 무덤덤하게 느껴졌다. 여름에 예고 없이 찾아온 태풍과도 같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미련한 건 내가 겨울에도 어김없이 태풍이 불어오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나 추운 겨울이었는지 온 동네에 함박눈이 보실보실 쌓였다. 어김없이 너가 있는 건물 앞에까지 걸음을 옮긴 나는, 고개를 들어 굳게 닫혀있는 학원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신 햇살 때문에 손을 눈 위에 얹고 뿌옇게 하늘로 새어 나가는 입김을 의식하며 멍하니 시선을 던졌지만, 시간이 지나도 열리지 않는 창문이었다.

 

 

  "여기 오지 않은 날은 없는 거야?"

 

 

  순간 뒤에서 내 어깨를 톡톡 치며 말을 걸어오는 누군가의 손짓에 깜짝 놀라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너가 아닐까라는 생각에 벅찬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애석한건지 당연한건지 내 뒤에 서 있던 사람은 너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그 남자였다.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저번과도 같이 장발의 머리를 반쯤 묶은 모습에 나는 잠시 말을 잃고 그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 맞지? 저번에 연습실 앞에서 도망친 애."

  "......"

  "가람이 애인?"

 

 

  스스럼없이 말을 뱉는 남자에게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저 멍청하게도 여전히 옴짝달싹하기만 했다. 남자는 말 없는 나를 내려다보다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말로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는 하는데, 은근 툭툭 내뱉는 말 들어보면 너희 평범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

  "맞지?"

 

 

  남자는 추운 듯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휴대폰을 꺼내 잠금을 풀더니, 손을 뻗어 나에게로 건네왔다. 나는 멍하니 그것으로 시선을 쫓았다.

 

 

  "번호랑 주소 좀 적어달라고."

  "...왜요?"

  "그냥."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 얼떨결에 휴대폰을 건네받아 자판을 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가방을 다시 한 번 끌어당기고, 나는 저장까지 완료한 후에 다시 넘겨주었다. 남자는 여유롭게 휴대폰을 받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난 현오야."

 

 

  이거 자기소개라도 해야 되는 건가. 어떻게 이 상황이 벌어졌는지도 이해가 가질 않지만, 어쨌든 나 역시 통성명은 해야 될 듯 싶어 남자에게로 시선을 다시금 던졌다. 

 

 

  "전 주은찬이요."

 

 

  뭐가 그렇게 여유로운지, 남자는 한 번 더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둥굴레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찬가람] Dear Lady part. 4 完  (0) 2015.02.28
[은찬가람] Dear Lady part. 3  (0) 2015.02.23
[은찬가람] Dear Lady part. 1  (0) 2015.02.05
[백건가람] 왕세자썰 6  (4) 2015.02.02
[은찬가람] 청가람 발ㅈ기 - 도서관  (0) 2015.01.1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