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Lady

part. 3

(청가람 ver.)

*현오가람 요소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의 시절을 기억해보라 하면, 우습게도 한편의 기억을 잃어버린 듯 띄엄띄엄 모든 것들이 끊겨 있기 일쑤였다. 그리 꼼꼼한 성격이나 또 기록해 놓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어릴 적 기억이라고는 항상 '혼자'였다는 특징밖에 찾을 수가 없었다. 날이 저물며 모친이라는 사람들이 제 아이들을 하나둘씩 집으로 손잡고 데려갈 때도 나는 항상 그네에 몸을 싣고 마지막까지 남아있곤 했다.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을 홀로 남아 시간을 때웠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외롭다거나, 또 저 친구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해본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혼자인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규제받거나 규칙을 지키거나 하는 결코 그런 미지근한 성격은 아니었기에.

 

  조금 더 살을 붙여서 말해보자면, 나는 정말이지 집이란 곳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가증스러워했다. 초등학생 때도 필통 하나 들은 책가방을 메고 항상 다른 곳에서 시간을 때웠다. 학교 옆에 있는 떡볶이집에 가서 어쩌다가 놀이터 그네 밑에서 주운 오백 원을 하나 내밀고는, 테이블에 혼자 앉아 하나하나 아껴먹으며 시간을 때우기도 하고, 바로 옆에 있는 오락실에 가서 6학년 형들이 신나게 하는 게임을 물끄러미 뒤에서 바라보기도 하였다. 벌써부터 어린 나이에 집은 돌아가야 할 공간이 아닌 제 발로 들어가면 생지옥이라는 사실을 이미 깨달은 것이었다.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술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그 흔히 말하는 알콜 중독자였다. 평소에는 너무나도 멀쩡하다가, 술만 들어가면 사람이 난폭해지고 어김없이 앞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둘렀다. 아주 늦은 밤에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들어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의 이름이 튀어나오면, 나는 항상 방으로 뛰쳐들어가 문을 잠그고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두 귀를 꽉 막곤했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어둠이 나를 삼켜버리기를 중얼거리면서.

 

 

  "가람아,"

 

 

  쿵쿵거리는 그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입술을 콱 깨물고 몸을 웅크렸다. 죽어버려. 죽어버려, 온몸을 족쇄로 조이는듯한 기분에 허우적거리며 어린 나는 싫다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억지로 비집어 열린 문을 발로 열어젖히고,

 

 

  "우리 가람이 어디 갔을까?"

 

 

  겁에 질려 공포감에 몸을 벌벌 떨고 있는 아이의 머리채를 한 움큼 쥐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기 일쑤였다. 그 뒤로는 무섭게도 기억이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린 듯 사라져버린다. 작은 몸을 웅크려 있는 내 앞에 서서, 그 커다란 몸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것만 희미하게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항상 패턴은 같았다. 나는 과거도, 앞으로의 미래에도 항상 같을 것이라는 걸 은연중에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무엇도 행동을 실행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가진 것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었고, 증오의 굴레에서 허우적거리고 발버둥 쳐봤지만 아무도 나에게 동정의 눈길조차 건네질 않았다. 나는 온몸을 아빠에게 맡겼다. 죽어버려. 단지 이 한 단어만 끓어오르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아빠가 낮에 알콜 기운에 취해 잠에 골아있으면, 밤에는 얼굴 한번 비춰주지 않는 엄마가 항상 집에 들어오곤 했다. 그리고 엄마의 손에는 모르는 남자가 깍지를 끼고 함께 뒤따라 들어왔다. 입을 꾹 다물고 소파 앞에 앉아 엄마에게로 시선을 돌아보면, 붉은 루주를 바르고 짙은 화장을 한 엄마가 가지런한 이를 보이고 씩 웃어 보이며 나의 손에 항상 간식을 건네주었다. 두 손으로 엄마가 주는 간식을 소중히 품에 안고, 소파로 다시 걸어가 항상 즐겨보던 티비 프로를 시청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한 번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쉿, 하고 제스쳐를 취한 엄마는, 모르는 아저씨를 손에 이끌고 아빠가 없는 다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문이 닫히는 동시에 엄마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오고, 이어서 귀를 찢어버릴 것같이 흉측한 소리가 집 안에서 울러 퍼졌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섞인 고통의 메아리. 어린 나는, 그저 티비의 볼륨을 최대한 크게 올려놓고 주변의 상황은 배척한 채 온 시선을 티비에만 집중하곤 했다. 엄마가 건네준 간식을 하나하나, 천천히 오물거리면서.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간식들은 다 하나같이 불량식품이었던 것 같다. 슈퍼 계산대 앞에서 파는 아폴로니, 과일 향 나는 풍선껌 아니면 쫀드기 따위들 말이다.  

 

  머리가 하나 더 크고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나는 항상 소위 말하는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리곤 했다. 물론 처음에는 이 애들이 무슨 애들인지, 무엇을 하는 아이들인지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저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이라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동질감이 들어서, 나는 이 아이들에게 더욱 의지하기 시작했다. 학교의 선생님들과 반 아이들한테는 어울리면 좋지 않은 질 나쁜 아이들이라고 평가됐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누구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의 기준은 누구나 다르기 마련이니까.

 

  나는 녀석들을 알게 된 시점으로부터 조금씩 숨을 트기 시작했다. 녀석들과 어울려 다니며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처음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중학교를 겨우겨우 졸업하고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고등학교로 배정된 후에 만난 새로운 친구들로 인해-, 당신을 만났다. 나 아는 형이 춤 전공하는데, 웬만한 사람들보다 잘 춰.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으로 그래? 라고만 대답했다가, 당신을 만나고, 처음으로 조금은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한 그것이- 결국 내 발목을 쥐어 잡게 된 것이었다.

 

  그때가 당신을 처음 만난 시기였다.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반대의 다정한 성격에 조곤조곤한 말투가 내 마음에 쏙 들어서,

 

 

  "이름이 뭐니?"

 

 

  낯을 많이 가리는 내가 주머니 안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며 아무 말을 못 할 때도,

 

 

  "얼굴처럼 이름도 예쁘네."

 

 

  놀란 눈으로 당신을 올려다 봤을 때도,

 

 

  "난 현오야.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두되."

 

 

 

  난생처음으로 귓가에 들릴 정도로 정신없이 뛰는 심장 소리에 주체를 못 하고 벙어리가 되어 당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반응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도 모른 채.

 

  이후 당신은,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나를 누구보다도 친동생처럼 잘 챙겨주었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춤을 전공하고 있다는 당신의 학원에 몇 번 놀러 가기도 하고, 졸려 죽겠는 정신을 부여잡고 야간 편의점 알바를 해 번 돈으로 밥 사주겠다며 됐다는 당신을 이끌고 가보기도 하고 나는 점점 당신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나면 당신의 학원으로 쏜살같이 달려가고, 가끔 정말 집에 들어가기 싫은 날에는 조르고 졸라서 당신의 침대에서 함께 잠을 청하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참 민폐인 행동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같이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나를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받아줬던 걸까.

 

  하루는 그랬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유독 요즘 들어 심해진 아빠라는 작자의 행동에 진절머리가 나서. 사실 오늘만큼은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핑 도는 눈물을 눈을 깜박이며 내쫓던 날이었다. 놀이터 그네에 앉아 앞뒤로 움직이는 놀이기구에 몸을 맡기다가, 문득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며칠간 대회 준비로 바쁘다 해서 얼굴 한번 보질 못했는데, 왜 하필이면 오늘이 돼서야 당신이 머릿속에 떠오른건지.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워 교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천천히 익숙한 당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르게 집에 들어가면, 마음이 포근해지는 그런 곳으로.

 

  그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즈음, 당신은 살짝 열린 베란다 문으로 두 팔을 난간에 걸치고 고개를 내민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며 기다란 검지와 중지에 담배 하나를 들고 입에 무는 모습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같이 기분이 묘해서 나도 모르게 몇 분 동안이나 당신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두 손으로 책가방의 끈을 꽉 쥐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초인종을 누른 뒤 당신이 문을 열고 나왔을때 는,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키가 큰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한참이나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날 내려다 보다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너무나도 다정하게 자고 갈려고? 라는 말을 건넸다. 나는 한참이나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초졸 하게 계란후라이와 몇 개의 반찬으로 저녁을 때우고, 나는 건네받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소파에 앉아 깎아놓은 사과를 하나 집어먹고 있는 당신의 옆에 털썩 앉았다. 사각거리는 과일의 소리를 들으며 아무 말 없이 틀어져 있는 티비를 응시했다. 그러다 용기를 내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어왔다.

 

 

"...형,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괜찮아."

 

 

  항상 나를 향해 지어주었던 웃음을 머금은 당신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면서,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사과를 손에 쥐어 한입 베어 물고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당신은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베란다 좀 나갔다 올게."

 

 

  추우니까 안에 있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담뱃갑을 챙겨 나가는 당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전처럼 난간에 팔을 기대고,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인다. 소파에 놓여있는 쿠션을 끌어당겨 안았다. 머리에 가려진 뒷목과, 탄탄한 등을 지나 길쭉한 다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또다시 넋을 놓고 멍하니 당신을 바라보다가, 뭐하는 짓인가 싶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는 소파 밑으로 발을 디뎌 내려와 베란다로 걸음을 옮겨갔다.

 

 

  "그거 맛있어요?"

 

 

  베란다 문을 열고 오소소한 기운에 팔을 쓸어내리며 당신의 옆에 몸을 멈췄다. 입에 담배를 물고 있던 당신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대답을 해왔다.

 

 

  "맛있기는."

 

 

  나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연기를 뱉는 모습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어서, 숨을 죽이고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들어가, 너 건강에 안 좋아."

  "괜찮아요."

 

 

  시선을 힐끔 내린 당신이 건네오는 다정한 말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무슨 맛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형, 나도 한번만요."

  "뭐를?"

  "이거요."

 

 

  까치발을 들어 당신의 손에 들린 담뱃갑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역시나 순발력은 당신이 더 빨랐다. 쓰흡, 나름대로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날 혼내려는 것 같은데, 역시나 무리.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는 아이마냥 칭얼거리며 아무것도 모르는 마음으로 한 개만 달라며 졸라댔다. 철이 덜 든 아이처럼, 마치 사탕 하나 달라는 듯이 졸라대며. 당신은 순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끝이 타들어 가는 담배를 다시 입에 물다가, 길쭉한 두 손가락으로 남은 담배를 뺀 뒤에-.

 

 

  "......"

 

 

  말캉한 무언가가 내 입술에 닿았다. 경직되어있는 내 어깨를 감싸 안고, 톡톡 혀끝으로 건드리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꾹 다물어진 입술을 열어주고 말았다. 순식간에 밀려 들어오는 혼미한 담배 맛에 나는 어지러움이 온몸을 지배했다. 시선을 어디다 두지 결정하지 못한 채, 나는 그저 멍하니 입을 맞춰오는 행동에 장단 아닌 장단을 맞춰주고 있는 것 같았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볼을 감싸 안고, 부드럽게 쓸어내리기도 하며 내 정신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인지 당신은 나의 허리께를 붙잡으며 조금 더 몸을 밀착해왔다. 내 작은 몸을 감싸 안으며,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아래로 떨어뜨렸는지 모른 채. 씁쓰름한 담배 냄새가 입안 멀리 퍼졌다. 당신을 닮은 냄새가, 내 온몸을 감싸 안아왔다.

 

 

  "....형아..."

 

 

  당신은 무언가에 잔뜩 취한 듯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집 안으로 걸음을 천천히 옮기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당신의 행동을 따라 하게 되서, 허리춤을 붙잡은 당신 때문인지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당신의 입맞춤에 두 팔을 목에 두르며 더욱 응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 채 그저 두 눈을 감고 현실을 거부하는 것 같으면서도, 따뜻한 체온이 너무나 가슴을 뛰게 해서.

 

 

  "하아, 형...현오형, 아-,"

 

 

  어느새 발뒤꿈치에 딱딱한 소파의 다리가 닿고, 당신은 내 목덜미에 여전히 입술을 파묻은 채 부드럽게 나를 소파에 눕혀왔다. 긴장하고 있는 내 어깨를 이어서 팔꿈치까지 쓸어내려 주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 그저 당신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항상 은연중에 만져보고 싶었던 당신의 탄탄한 등허리도 손을 펴서 더듬어보기도 하고, 부드러운 머리켤을 만지작거려보기도 하고. 내 귓가에 뜨거운 숨을 뱉으며 당신은 점점 밑으로 손을 뻗어 갔다.

 

 

  "형, 아니..형-,"

 

 

  순간, 당신의 손길이 너무나도 낯설어졌다. 아니야. 이건 내가 알던 손길이 아니야, 더는 당신 같지가 않다. 두려움에 질린 눈빛으로 팔을 뻗어 당신을 밀어냈다. 연신 낯선 손끝으로 내 몸을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나도 불쾌해졌다. 몸이 경직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머리끝까지 차고 올라와서 애타게 당신을 불러왔다.

 

 

  "하지 마요,"

 

 

  기어코 눈물이 터졌다.

 

 

  "하지 마, 이건, 아빠나 하는 짓이잖아...제발 하지 마요..."

 

 

  순간 당신이 모든 행동을 멈췄다. 작은 거실에서는 조용한 나의 울음소리만 울러 퍼졌다. 이어서 당신의 한숨 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나는 서럽게 울었다. 무서워, 무서워. 하지마.

 

 

  "...미안해."

 

 

  몇 분이나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당신은, 나의 옷을 추스려 주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굳어 있는 나의 허리를 붙잡아 올려 울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내 볼을 감싸 안더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품에 안아왔다.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다시 익숙하게 돌아온 당신의 품 안에서 멈추지 않는 눈물을 떨구는 일 밖에는. 

 

 

  "언제부터 아빠가 그랬어?"

 

 

  당신은 눈물 날 정도로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적으로 어릴 적 시절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구석에 웅크려 앉아 있는 한 아이에게 다가오는 남자가, 그 이후로... 나는 눈을 꾹 감았다. 항상 이어지는 일상들이었다. 엄마가 간식을 건네주고,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아빠에게 정신없이 설명할 수 없는 몹쓸 짓을 당하고. 기억이 잘 안 나요...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신은 과연 내 마지막 말을 들었으려나.

 

 

  "...가람아,"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나답게 행동할 수 있는 건 당신 앞에서만이라는 것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눈물을 안으로 머금으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죽어버려. 연신 마음속 깊이 묻혀있던 분노와 고통이 섞여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앞에서, 나는 아이마냥 소리 내어 잔뜩 울었다. 그리고 상냥한 당신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나를 따스한 체온으로 안아줄 뿐이었다.

 

 

 

 

 

  며칠간 나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당신의 집에 머물렀다. 사실상 계속 당신의 향기가 묻어나오는 침대에서 온종일 잠만 잤다는 게 진짜이지만 말이다. 며칠을 그렇게 꼬박 잠이 들었을까, 밖은 어둑해져서 눈을 떴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 빈 천장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눈을 여러 번 깜박이며, 손을 뻗어 눈을 비벼왔다. 침묵을 유지하는 집 안에는 오직 나만 존재하는 듯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눈빛으로 기다랗게 만들어진 침대의 그림자를 쫓았다. 기분이 몽롱했다. 과거의 모든 기억들이 완벽하게 사라진 듯했다. 

 

  나는 침대 밑으로 발을 디디고 내려와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통에 담겨있는 유리컵에 물을 따라 몇 모금 목을 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왠지 모든 일이 원위치가 된 묘한 기분이었다. 순간 이렇게 며칠간 잠이 들기 전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팍, 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우습게도 저번에 느꼈던 반대의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오래 흐른 것도 아닌데, 참 웃기지. 자꾸만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이마 뒤로 편하게 넘겨버렸다.

 

  왠지 오늘이 아니면 안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정말 '청가람'으로 지낼 수 있는 당신 앞에서, 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남은 삶을 살아가면서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잠을 자면서 꿈을 꾸면서도, 조금 더 발을 디디고 올라선 나의 모습은 단 한 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훌훌 털어버리고 모든 것을 잊고 싶어도 자꾸만 어릴 적의 끔찍한 기억들이 내 발목을 잡았다. 벽을 무너뜨리려 하고 부셔 버리려 해도 결코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는 모습에 나는 넘어설 기회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결심을 해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당신은 일이 끝났는지 몸을 추스르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거실에 불도 켜지 않은 채 티비를 보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이제야 일어났냐며 다정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몸은 괜찮아? 밥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나를 대하는 태도에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껴안았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며 고르고 있는 사이, 금세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온 당신은 내 옆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왔다. 한참이나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말이 없었다. 당신은 나름대로 저번의 일을 신경 쓰고 있는 듯 보였다. 답지 않은 당신의 모습이 괜스레 귀여워서 보이지 않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형,"

 

 

  당신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생각보다 실행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뭐라고 대답해올까, 지그시 흔들리는 목울대를 가다듬고 나는 꿈에서부터 생각해왔던 그 말을 천천히 흘려보냈다.

 

 

  "나랑 다시 한번, 한 번만... 자주면 안돼요?"

 

 

  뒤끝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말에 당신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한 채 연신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당신을 올려다보며, 소파에 앉아있는 당신의 허벅지 위로 몸을 옮겨왔다. 당신은 연신 내 몸을 밀어냈다. 하지만 나는 결심한 듯 길게 뻗은 소파 위로 당신의 몸을 밀어 내려뜨리고, 누워있는 당신의 위에 다시 올라탔다. 탄탄한 배 위에 몸을 얹고 당황한 당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으로 달빛이 얼굴 위로 비쳐왔다. 눈이 부실 정도로 멋있어서, 나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다시 한 번 당신의 거친 입술에 살짝 입맞춤을 해왔다. 두 팔을 당신의 얼굴 사이에 두고 몸을 지탱한 채, 나는 저번에 당신이 해준 것처럼 혀를 가뿐히 밀어 넣었다. 저번에 했을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뜨거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가쁜 숨을 내쉬며 당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벌려진 안쪽 허벅지 사이로 잔뜩 부풀어 오른 무언가가 노골적으로 느껴져서, 나는 작은 소리를 뱉었다. 한참이나 입을 맞추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떨어진 입술 사이로 기다란 은빛의 타액이 주욱 늘어나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신과 시선이 마주쳤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엉망이 돼버린 내 얼굴을 바라보던 당신은, 기어코 입을 열어왔다.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니...."

 

 

  나는 두 눈꼬리에 눈물이 아닌 무언가가 잔뜩 맺힌 채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내가 제자리걸음만 할 것 같아서. 틀에 갇힌 나를 밖으로 도망치게 하고 싶어서, 나는 당신의 부드러운 손을 붙잡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당신은 손을 뻗어 아득하게도 내 볼을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그래. 당신은 대답했다. 그래. 다시 한 번더. 

 

  그리고 그다음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나는,

 

 

  "...형,형...흐으...형아..."

 

 

  나와 함께 된 몸을 끌어안아 주는 당신의 손길에 중독되어 탄성을 내질렀다. 당신은 땀에 젖은 앞머리도 눈물 날 정도로 다정하게 쓸어주고, 처음 느껴보는 흥분에 어쩔 줄 몰라 제대로 가눌지 못하는 아이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다시 한 번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고,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대고는 시선을 또다시 마주했다.

 

 

  "가람아."

  "흐으..."

 

 

  행복해. 이제 여기서 콱 죽어버려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나는 연신 울부짖으며 당신을 끌어당겼다. 움직이는 몸짓에 나는 당신의 허리에 두 다리를 감아오며 더욱 당신을 재촉했다.

 

 

  "예뻐, 가람아. ...누구보다도 예쁘다."

 

 

  당신은 나의 갈색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으며 귓가에 녹아버릴 것 같은 말들을 속삭였다.

 

 

  "아, 아...형아, 현오형...흐으..."

 

 

  우습게도 이날은, 수없이 많은 관계를 가져왔지만 내 생에 처음으로 함께 있으면 마음이 뛰는 사람과 함께 '오르가즘'이라는 것을 느낀 첫날이었다.

 

 

 

 

 

  그리고 나중의 일을 얘기해보자면, 딱히 당신은 나와 몸을 섞어놓고도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저 예전처럼 평범한 형 동생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내가 당신에게 진심으로 무용을 전공하고 싶다고 넌지시 말을 건넨 것뿐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이 시간부터 선생님이란 호칭을 제안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의 말에 승낙했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은 일상이었다.

 

  하루는 당신에게로부터 받은 검은 색 무용복을 입고 레슨이 끝난 후 연습실 바닥에 벌러덩 누워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니 음악이 나오는 카세트를 만지고 있는 당신이 시야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당신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선생님, 하고 당신을 불러왔다.

 

 

  "응?"

 

 

  고개를 돌려오며 당신은 나를 언제나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봐주었다.

 

 

  "좋아해요."

 

 

  나는 두 눈을 깜박였다. 당신은 나의 말을 듣고 가만히 행동을 멈추더니, 다시 시선을 카세트로 돌렸다. 나 역시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옆으로 넘기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순간,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나도 가람이 좋아해."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나는 누워있던 탓에 살짝 먼지가 묻은 팔꿈치 부분을 털어냈다. 당신과 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괜찮아. 후, 불었던 먼지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처음보다 무용도 꽤 많이 늘고, 나와는 별 상관이 없지만 벌써 입시를 준비하는 3학년에 들어섰다. 그리고 당신과 몸을 섞은 후에 나는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집 같지도 않은 집에서 도망을 나오고, 당신이 구해준 작은 월세방에 몸을 옮겼다. 이제 맘 편안하게 생활해도 되. 다정함을 잃지 않은 당신의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나는 새로운 시작에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나도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 무용 연습도 더 열심히 하고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훌훌 털어버리자고 자신에게 약속했던 시절들. 하지만 행복이 찾아오면 불행이 온다더니, 우습게도 나에게는 연속으로 불행만 주구장창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웃기게도 그날도 역시나 레슨이 끝나고 혼자 살게 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큰 번화가가 있어 밤마다 취한 취객들이 몰려다니는 그런 곳을 어김없이 지나치는데, 누군가가 내 이름을 익숙하게 불러왔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어 무시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옮겼다. 하지만 또 누군가가 다시 한번 더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을 때는,

 

 

  "우리 가람이 아니야~ 잘 지냈어?"

 

 

  자주 아빠와 함께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던 이름 모를 아저씨가 코가 잔뜩 빨개진 채 날 바라보며 서 있었다. 순간 온몸이 경직되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잊고 싶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끔찍한 기억들이 다시 한 번 온몸을 상기시켜주는 듯했다. 이제서야 괜찮아졌는데, 괜찮아졌는데... 혀가 잔뜩 꼬인 채로 나에게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 때문에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뭐 하고 지냈니? 응?"

 

 

  순간적으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스물스물 머리끝까지 채워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괜찮아졌는데, 난 이제 괜찮아... 했던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져서 어지러워져만 갔다.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으며, 점점 나에게로 다가오는 남자를 피해 천천히 걸음을 뒤로 옮겨갔다. 그리고는 결국 발끝에 걸린 무언가에 뒤로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내 위로 점점 어두운 그림자가 나를 감싸 안았다. 두려움에 증폭된 정신이 모든 신경들을 조종하여 몸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가, 너는 정말 타고났어.'

 

 

  귀를 막았다.

 

 

  '어쩜 이렇게 예쁜 짓만 할까. 아저씨가 이거 줄 테니까 얼굴 좀 들어볼래?'

 

 

  귓가를 맴도는 환청들에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이제서야 괜찮아졌는데... 웃기게도 모든 것이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나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에 몸을 일으켜 도망쳐야 된다는 생각이 드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저주스러운 몸뚱아리였다. 그리고 남자는,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려왔다. 아아, 이제 끝이야... 누군가 후두를 끊어버린 듯 컥컥거리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거칠게 올려 들려진 탓에 신발 한 짝이 힘없이 벗겨졌다. 

 

  "우리 아가, 아저씨랑 재밌는 거 하러 가자,"

 

  내가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텅 빈 두 눈으로 그저 멀어져가는 짝을 잃은 신발 하나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모든 게 끝나버린 모텔 방 안에서는 비릿한 정액냄새에 가득 차 구역질을 유발했다. 헛구역질을 헤대며 다리 사이로 엉망으로 흐르는 무언가를 거칠게 이불로 닦아버리고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꽃병을 집어 저 멀리 세게 던져버렸다. 쨍그랑, 꽃병이 깨져 사방으로 흩어지는 유리조각이 손에 집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리에 몸을 엎드렸다. 몸에 스치는 유리조각들에도 아무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러워. 더러워, 죽어버려, 죽어버려!'

 

 

  갈색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한 움큼 쥐어 잡았다. 바닥에 엎드려서 그저 계속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바닥은 이미 투명한 무언가로 흠뻑 젖어 마를 생각을 일절 하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걸어나가려 해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구나. 절망과, 분노와, 증오가 또다시 뒤섞여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졌다. 난 뭘 해도 안될 운명인가 봐. 갈색의 머리카락에 가려진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이 너무나도 익숙해서 부서질 것 같은 몸을 바닥에 기대었다. 다리를 뻗고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다가, 두 눈을 꾹 감아왔다.

 

  그때부터였다. 정신을 놓고 마구잡이로 여러 사람과 몸을 섞기 시작한 건. 그때만큼은 '청가람'이 아니기를 자신에게 세뇌시키면서, 항상 짧게 머리를 치던 나는 머리를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기르기 시작하고, 엄마가 매번 하던 짙은 화장을 나에게 덧입혔다. 나는 나에게 마치 벌을 주는 듯 항상 아빠 뻘의 사람들과 섹스를 하고, 돈을 받았다. 섹스할 때는 혼이 나간 듯 그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따라 하고, 끝난 뒤 돈을 주고 그 사람들이 방을 나가버리면 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와서 마구잡이로 물건을 던지며 미친 사람마냥 흐느끼곤 했다. 스스로 고문하는 듯 내가 아닌 정신이 나를 지배하는 것만 같았다. 최고로 맛있는 년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정말 창문을 열고 몸을 던져버릴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세상을 굳이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 그때만큼은 무용도, 현오도, 그 무엇도 나를 '나'로 되돌릴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변질되어서, 더럽혀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습게도 주은찬이라는 아이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때는 반쯤 미쳐서, 무슨 생각으로 학교에 갔는지도 모르는 시절이었지만. 입시가 시작될 3학년일 때 너는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다. 전학을 온 이유는 아무도 자세히 몰랐지만, 전 학교에서 무슨 사고를 쳐서 겨우 전학을 온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누가 오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지만 주은찬은 아니었다. 그 아이는 매사에 시큰둥해 보이는 듯 보여도, 은근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다 꿰뚫고 있었다. 나에게 시비터는 귀찮은 아이들에게 주먹질을 할 때면 꼭 옆에 주은찬이 서서 구경하고 있었고, 수업시간에 볼펜을 물고 꾸벅꾸벅 졸다가 문득 잠이 깨서 고개를 돌리면 그 아이는 항상 나를 향해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묘한 사람이었다. 가끔가다 눈이 마주치면, 너는 그 순진한 얼굴로 작게 웃음을 지어왔다. 익숙하지 않았다. 도대체 넌 뭐니. 주은찬은, 인정하기 싫지만 어느새 현오 다음으로 관심이 가는 인물 중 한 명이 돼버린 것이었다. 

 

  또한 옥상에서 주은찬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나는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몸 섞는걸 그만두라고? 그러면 난 어떻게 살아가지? 내 죄의식은 어떡하라고? 나는 차마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서 가늠할 수 가 없어졌다. 머릿속이 실타래가 꼬인 듯 무척이나 복잡해졌다. 그 망할 붉은 머리색이 눈앞에서 연신 이글거렸다.

 

 

  '그리고 그만둬. 왜 도대체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주은찬이 나에게 건넨 말이 불현듯 머릿속에 지나갔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이불을 끌어안으며, 눈을 반쯤 감고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게, 왜일까..."

 

 

  나조차도 내릴 수 없는 결론을 너가 내줄 수 있겠니.

 

 

 

 

 

  그리고 결론은 나왔다. 나는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딱히 너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기회로 너란 아이를 내 기억 속에서 지워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는 나와 어울리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혹시라도 내가 너를 물들일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에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항상 뒤로 짧게 묶고 다녔던 익숙지 않은 머리는 이 기회로 확 잘라버렸다. 항상 뜯어버리고 싶었던 갈색 머리도 검게 물들였다. 그리고 한동안 찾아가지 않았던 학원도 이제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현오는 몇 개월간 연락이 끊겼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온 나를 보자마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어서 평소같이 나를 학원 안으로 맞이해주었다. 그리고 어디다 뒀는지 기억도 안 나는 내 무용복을, 락커에 내버려져 있던 걸 가지고 있었다며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싶고, 아무것도 묻지 않은 현오에게 너무나도 고마워서 쥐구멍으로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그렇게 나는 학교를 그만뒀다. 무용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방황할 때도 학교를 나가지 않았던 탓에 이미 퇴학처리가 되어있을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하지만 속은 후련했지만, 연신 마음에 걸리는 한 사람이 있어서 문제였다. 내가 눈앞에 밟힌다는 말을 건넨 너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이제 나와 끝난 사람이라고, 더이상 얽힐 일도, 만날 일도 없다고 생각해봐도 너의 그 또렷한 두 눈동자가 내 마음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하루는, 레슨이 끝난 후 현오와 함께 오래간만에 저녁을 먹으러 학원을 나서는 길이었다. 미리 나온 반찬들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는데, 오늘따라 뭔가 이상한 현오가 나에게 어김없이 말을 걸어왔다.

 

 

  "가람아, 너 혹시 누구랑 사귄 적 있지 않니?"

 

 

  나는 순간 사레가 들려서 물이 담긴 컵을 입에 쏟아부었다. 켁켁거리며 무슨 소리냐며 현오에게 말을 건네는데, 꽤나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아직까지 목이 아파서 물을 한 모금 더 마시다가, 힐끔 현오의 시선을 살폈다.

 

 

  "없어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부정했다. 정말? 다시한번 물어보는 현오에게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사귀지 않은건, ...맞는 사실인걸. 불현듯 너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갔지만, 헛웃음이 터져 나와서 생각을 지워버렸다. 앞으로도 없을 일일뿐더러 있으면 안되는 일이니까.

 

 

  "돌아가면 안 되는 거야?"

 

 

  또다시 현오는 나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잠시 컵에 물을 따르다가, 벌써 나온 순두부찌개에서 올라오는 김 때문에 고개를 들었다.

 

 

  "그럴 거 같은데요."

 

 

  애매모호하게 대답을 한 나를 여전히 현오는 바라보았다.

 

 

  "나랑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서, 붙잡을 수가 없어요. 그런 낯간지러운 건 나랑 안 어울리기도 하고."

 

 

  씁쓸하게 웃음을 지어보았다. 나는 너에게 알맞은 사람이 아닌걸. 그리고 현오는 물끄러미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왜요, 또 물어볼 거 있어요? 나는 조금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돌아가는 게 어때?"

 

 

  그리고 손을 뻗어, 예전으로 돌아간 것 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익숙한 손길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서 멍하니 현오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제가 어떻게 돌아가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현오에게 대답을 했다. 파렴치한 내가, 어떻게.

 

 

  "여기."

 

 

  현오는 내 손에 자그맣게 몇 번 접혀있는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나는 물끄러미 작은 내용물을 바라보다가, 현오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열어보라는 손짓에 나는 조심스럽게 쪽지를 펴기 시작했다. 내가 쓴 거긴 하지만, 직접 받은 거야. 쪽지에는 처음 보는 주소와 전화번호,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 세 글자가.

 

 

  "그 애, 너한테 말도 못 걸고 학원 앞에서 서성거렸던 거 알아?"

 

 

  알아요. 사실 다 알고 있었다고. 너가 계속 내 주변에서 맴돌았던 것 모두다 알고 있었다고. 나는 물끄러미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애꿎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바보 같기는. 내가 아는 척이라도 해줄까 봐.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눈앞에 아른거리는 너에게 조금 애정이 섞인 농담을 던졌다.

 

 

  "가람아,"

 

 

  다시 한 번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돌아가."

 

 

  두 번 다시 책망하지 말고. 마음이 찌르르, 울려왔다. 어슴푸레한 너의 형상이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현오는 아무 표정없이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나를 보며 슬몃 웃어왔다. 너가 문득 보고 싶어졌다. 너가 나를 향해 던졌던 말들과, 지어줬던 미소와, 올곧은 눈빛이 눈앞에서 자꾸만 아른거려서. 너와 제대로 알고 지낸 기간은 몇 개월조차 되지 않는데, 이렇게까지 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해버리다니 사람 마음 참 웃기지.

 

 

  "선생님,"

 

 

  의자에서 앉아있던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현오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슬며시 끄덕여왔다. 고마워요. 인사를 건네고는, 발걸음을 천천히 나섰다. 내일 보자. 포근함이 가득 담겨있는 현오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주머니에 소중히 들어있는 쪽지의 주소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은찬 너가, 나의 집을 찾아올 때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사실 나는 너와 그런 곳에서 그런 차림으로 너를 만나는 것은 정말이지 꿈에서도 상상 못할 일이었는데, 너도 과연 나를 보면 놀랄까. 아니면 이미 예상하고 있을까.

 

  점점 걸어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져서, 나는 조금 속도를 내어 뛰기 시작했다. 벌써 어둑어둑해졌잖아. 가쁜 숨을 내쉬며, 하얀 입김이 몽실거리며 올라가는 하늘을 문득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낮춰 멀리 있는 작은 주택을 바라보았다. 괜스레 카키색 야상을 입은 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과연 올바른 선택일지 미래에 후회할 일일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쪽지에 적혀있는 주소에 도착하고 나서는 우습게도 꽤나 떨리는 마음으로 벨을 눌렀지만, 역시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너가 안에 없는 모양이었다. 혹시 문을 안 잠그지는 않았을까 슬며시 문고리를 잡아 돌렸더니 웃기게도 탈칵하고 손쉽게 열려왔다. 너다운 모습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집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서, 주변을 살폈다. 옷이 널브러져 있는 침대에서 편한 옷가지 두 개를 집어 들고는 조금 추운 것 같아 보일러를 틀고, 욕실로 들어갔다. 옷에서 나는 너의 익숙한 향기에 웃기게도 마음이 무척이나 안심이 됐다. 너를 다시 볼 수 있는 건가. 정말 여기 너란 아이가 존재하고 있다니. 너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나는 명확한 정답을 내렸다. 너가 사용하는 샴푸와 바디샴푸를 쓰고, 너의 향기가 나는 옷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을 때는,  

 

 

  "...이제야 오니?"    

 

 

  멍하니 책가방을 소파에 올려두는 너와 정면으로 마주쳐서, 입을 천천히 열어왔다. 더는 보지 못할 것 같았던 그 얼굴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벅차올라서, 주춤거리며 떨리는 두 손을 몸 뒤에 얼른 숨겨왔다. 그리고 너는, 주은찬 너는.

 

 

  "......."

 

 

  표정을 알 수 없는 너가 나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와 몸이 부스러질 정도로 나를 힘껏 품 안으로 안아왔다. 아아. 너의 불규칙한 숨소리와, 너에게서 나는 익숙한 향기에 나는 너의 품 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너를 갈망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렇게 내가,

 

 

  "청가람, 가람아...가람아..."

 

 

  반가울리가 없잖니...

 






▼현재 dear lady 수량조사 받고 있어요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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