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Lady

part. 4 完

(주은찬 x 청가람)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뜨거운 열기와 함께 여름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몇 년을 써왔음에도 불구하고 덜덜거리면서 양옆으로 잘만 돌아가는 선풍기에서는 더이상 시원한 바람이 아닌 더운 바람을 만들어냈고, 부채를 부치는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 빨라져서 그나마 더운 공기를 애써 쫓아내고 있었다.

 

 

  "...더워,"

 

 

  얇은 티셔츠를 입은 채 배를 까고 훌러덩 누워있던 너가 작게 투덜거리며 옆에 덩달아 누워있는 내 옆구리를 콕콕 찔러댔다. 주은차안, 말 뒷꼬리를 늘리며 은근 나를 재촉하는 손짓에, 나는 왼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들어 얼굴을 향해 부쳐주었다. 그제서야 두 눈을 감으며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는 너가 꽤나 귀여워서, 나는 더욱 손에 힘을 실었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너는, 시작된 살인적인 여름 날씨에 적응하지 못해 온종일 내내 조금이나마 차가운 집 바닥에 등을 딱 붙이고 뒹굴거리곤 했다. 이번 달에는 돈이 조금 남아 사다 놓은 수박도 하나 두 개 오물거리더니 시원하다며 반 통을 그 자리에서 비우는 걸 보고 깜짝 놀라 뺏은 기억도 있었다.

 

  너와 함께 맞는 첫 여름은 꽤나 기분이 묘했다. 결코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던 고등학교 졸업도 이미 지난 지 벌써 몇 개월이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의 긴 시간 동안 나는 너와 줄곧 함께했다. 너가 우리 집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선물처럼 혹시나 금방이라도 다시 사라져버릴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의 기간들이 없었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다. 좁은 침대의 내 옆자리에 누워 어여쁜 두 눈을 감고 자는 너의 모습도 마치 현실이 아닌 것 같아서 항상 자다 깨다 너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너를 끌어안고 잠을 청하는 것이 일상이 돼버렸다. 너는 그 날을 중심으로 나에게 돌아온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 역시 너에게 꼬치꼬치 이유를 캐묻지도 않았다. 나는 너가 나에게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졸업이 나를 찾아온 것뿐만 아니라 어른이라는 단어 아래의 책임감도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저 어떻게든 살다가 어디서 콱 죽어야겠다는 어린 시절의 생각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어쨌든 세상 흘러가는 모습은 알아야겠다 싶어서 대학교도 진학했다. 또한 항상 어김없이 나를 몹시나 괴롭게 하는 왼쪽 손목의 메탈시계도 너가 내 옆에 있으면 잊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도, 들키지도 않은 나 혼자만 알고 있던 흉을, 너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곤 했다. 너는 딱히 특별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래서 안심이 됐다. 정말 우습게도.

 

  하지만 딱히 어른이 되어도 생활패턴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한 가지 달라진 사실이 있다면 너는 여전히 그 학원에 다녔고, 나는 하루의 수강이 마치면 너의 학원 앞에서 너를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루는 레슨이 길어져서 늦게 끝나 학원 안에 들어와 너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항상 들려오는 익숙한 클래식의 음악 소리가 천천히 끊겨오고, 두 명의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커지더니, 갈아입기 귀찮다며 무용복 위에 나의 점퍼를 하나 걸친 너가 문을 열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하얀 피부에 어울리는 너의 무용복이 꽤나 잘 어울려서 나는 한참이나 머리가 띵해서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왜 그러냐는 너의 말에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로 손을 뻗었다. 너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주머니에 넣어있는 반대쪽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내 손을 맞잡아왔다. 갈게요! 순간 너는 고개를 뒤로 돌리고는 손을 흔들며 인사해왔다. 그리고 문에 기대어 서 있던 장발의 남자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저번에 만났던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남자는 먼저 작은 미소를 지어왔다. 나는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운 눈빛으로 응답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내 손을 잡은 채, 배고프다며 투정부리는 너의 뒤통수를 내 품으로 끌어당기면서 말이다.

 

  창문 밖으로는 잠자리들이 서로 술래잡기를 하듯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었고, 저 멀리 나무들에서는 매미들의 떼창이 시끄럽게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더위를 그다지 타지 않는 나 역시 뜨거운 습기와 열기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하물며 더위를 많이 타는 너가 방바닥에 엎어져 시체놀이를 하고 있는 건 그닥 놀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순간, 나는 몸을 벌떡 세워 앉았다. 신경질 나는 앞머리를 대충 뒤로 넘겨버리고, 이어서 흐물거리는 너의 등을 잡아 올려 일으켰다. 꽤나 불쾌함이 묻어있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너에게 어서 일어나라며 재촉했다. 너는 몹시나 짜증 난다는 얼굴로 갑자기 일어난 일에 뭐를 할 거냐며 물었지만 나는 그저 너의 손을 이끌고 가서 신발을 신기기에 정신이 팔렸다. 흰 티셔츠에 반청바지를 입고는 쪼리를 신은 너는 영락없이 여름을 나고 있는 익숙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문단속을 두어 번 하고, 나는 지갑 하나만 주머니에 넣은 채 너를 이끌며 동네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딜 가느냐며 연신 되묻는 너에게 그저 작은 웃음으로 답변을 하고, 발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여름의 모든 것이 묻어있는, 그곳으로 말이다.

 

  사람이 적은 곳을 다행히 잘 찾아서 그런지, 바다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짭조름하지만 시원한 바닷바람에 너는 숨을 죽이고 멀리 시선을 던졌다. 그런 너가 새로워서 나는 한참이나 바다를 바라보는 너를 내버려두었다. 햇빛 아래 빛나는 너의 깔끔하게 정리된 흑발의 머리와, 워낙 마른 탓에 허해 보이는 목덜미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게 너는 뜨겁지도 않은 듯 발가락 사이로 밀려 들어오는 바닷물을 장난치며 놀았다. 어둑어둑해져 노을이 저 멀리 보일 때까지, 그렇게. 

 

  몇 시간 동안이나 혼이 빠지게 바다에 머물러있던 우리는, 조금 어두워진 탓에 바다 바로 앞에 있는 작은 펜션에 방을 하나 빌렸다. 얇은 이불과 베개, 바다가 잘 보이는 큰 창문까지 확인한 너는 조금 신이 난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밖은 어두워지고, 우리는 주변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는 다시 돌아온 터였다. 얇게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하루종일 있었던 바쁜 일과에 너는 지친 듯 이불을 깔고 몸을 스트레칭 하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보는 너의 모습은 새삼스럽게도 정말이지 새로웠다. 사실 항상 너는 새롭다. 몸을 녹아버릴 것 같은 살인적인 더위처럼. 너는.

 

 

  "주은찬,"

 

 

  너는 내 이름을 불러왔다. 옆자리를 손으로 팡팡 치며 이리 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잘 거야?"

  "음...조금 이따가?"

 

 

  낮보다는 시원해진 날씨가 맘에 들은 듯 너는 창문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등진 채 대답을 해왔다. 그래, 이따가 같이 자자. 나는 수건을 의자에 걸어놓으며 방 불을 끄고 나서는 너가 깔아놓은 이불 옆에 몸을 뉘었다. 어둠이 방을 삼키자마자 무섭게도 침묵이 우리 둘을 감싸 안았다. 그렇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다가, 손으로 고개를 바치고는 너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순간 너와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주은찬,"

 

 

  너는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불렀다. 조금 흔들리는 말끝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응. 짧게 대답을 해왔다.

 

 

  "우리, 무슨 사이일까."

 

 

  조금 침묵이 흘렀다. 창문 밖에서 파도소리가 미세하게 흘러들어왔다. 나는 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줄곧 너를 바라보았다.

 

 

  "...무슨 사이이긴."

 

 

  나는 쓴웃음을 지어보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이 없는 우리 사이를, 꼭 정의내려야만 하는 걸까. 너의 조금씩 떨리는 두 깊은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 둘은 서로의 시선을 결코 피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너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리고 나는,

 

 

  "......"

 

 

  더위를 먹은 것 같았다. 얼굴을 천천히 너의 쪽으로 가까이 하고, 입술을 슬며시 갖다 대었다. 부드럽고 뜨거운 무언가가 입술에 진득이 닿았다가 빠르게 떨어졌다. 너와 시선이 순간 마주쳤다. 너는 나를 바라보며 설명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두 눈을 감고 입술을 다시 한 번 맞춰왔다. 손을 뻗어 너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너의 위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너의 몸 사이에 다리를 지탱하고 입술을 짓눌렀다. 고른 치아와 말캉한 무언가가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손을 내려 너의 팔을 지그시 훑어 내렸다.

 

 

  "...가람아,"

 

 

  입술을 떼고, 살짝 달아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는 너의 얼굴이 달빛 아래 고르게 내비쳤다. 내 한 손에 깍지를 끼고 있는 너의 촉감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너의 배 언저리를 만지며 땀에 송글송글 맺힌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가람아..."

 

 

  뜨거운 것이 맞닿고, 다리를 벌려 내 허리를 세차게 감싸오는 너의 행동에 나는 너에게 손을 뻗기 시작했다.

 

 

  "아,아...주은찬..."

 

 

  둘다 아무래도 심한 더위를 먹은 듯싶었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긋지긋하기도 하지만, 가끔 시원했던 그런 끈적한 여름이.

 

 

 

 

 

  너는 언젠가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렇게 두꺼운 메탈시계 차고 다니면, 여름에 덥지 않아?'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신기한 듯 내 왼손을 붙잡고 이리저리 바라보는 너에게 나는 항상 그저 웃음으로 답하곤 했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으면, 툭 튀어나온 입술에 갑작스럽게 짧은 키스를 해주고는 당황스러워하는 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주은찬, 넌 너무 나한테 숨기는 게 많아.'

 

 

  그래서 삐졌어? 살짝 눈을 흘기는 너를 내 품에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평생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너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간지럽다며 내 등을 팡팡 치는 너의 행동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너의 앞에서 움츠러들어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나의 모습이, 언젠가는 산산조각이 나서 깨져버릴 날이 결코 멀지 않았다고. 

 

  그리고 생각외로 너와 나의 마음만으로도 모든 것을 충분히 채워주지는 않은 듯했다. 시선을 뻗어 현실을 직시하자마자 너와 마주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름이 지나가고 언제부턴가 대학교 주변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고등학교 때와 1학기 때 소홀히 해왔던 밀린 공부를 시작하려니 하루에 24시간으로 턱없이 부족했다. 거기다가 관심은 하나도 없었지만 동기 때문에 얼떨결에 들은 동아리 활동과 이어지는 술자리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나서 제일 먼저 달라진 사실은, 학원 레슨이 끝난 너를 항상 기다리는 입장이었던 내가 너로부터 마중을 받게 된 것이었다. 학교와 학원이 조금 시간이 걸리는 거리인지라, 너를 맞이하러 가는 시간에서 나는 조금씩 티 나지 않게 지각하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숨을 몰아쉬며 뛰다 보면, 학원 앞에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너에게로 뛰어가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던지던 너는 익숙한 얼굴로 시선을 올리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뭐하다 늦었어?"

  "미안, 미안. 알바가 조금 늦게 끝나서."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나에게 살짝 눈을 흘기고는, 너는 유유히 앞장을 서서 뒷짐 쥐며 걷기 시작했다. 그런 너의 모습을 보며 나는 너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까지는 너의 투정부림이,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하지만 기간은 짧았다. 계속되는 과제와 스트레스만 쌓이는 조별과제, 이어지는 술자리들이 나를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발에 부리나케 아르바이트를 하러 걸음을 옮기고, 밤을 새워 과제를 마치고 학교에 가기 전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의 숙면을 취하다 보니 이러다가 정말 어디 길 걸어가다 픽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는 너를 '덜'챙기기 시작했다. 정말 피곤한 날에는, 레슨이 끝난 너를 데리러 가는 우리의 암묵적으로 동의한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런 날은 말 그대로 집에 냉기가 돌았다. 밤늦게 일이 끝나 피곤이 묻어있는 얼굴을 한 채 집을 들어와도, 너는 매정하게도 나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먼저 잠이 들어있곤 했다. 너는 나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그 작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내가 미워서, 괜히 깨어있다가 사소한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큰 것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사실 처음 내가 너와의 약속을 깬 날에는, 집에 먼저 들어와 있는 너는 내가 들어와도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은 채 투명인간 취급을 하곤 했다. 온종일 공부와 일에 시달린 탓에 진이 다 빠져서 지친 내가 너의 기분을 풀어주려 애써 말을 건네봐도, 티비에만 시선을 집중한 채 내 말은 듣는 척도 안 하는 너의 모습이 처음으로 미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급기야 너가 이해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 서운했던 내가 그만 화 좀 풀어, 라며 툭 말을 던지면 너는 너무나도 얄밉게 대답을 했다.

 

 

  "나 화 안 났는데?"

 

 

  라고. 결국 너를 포기하고 침대에 드러누운 내 행동 때문에 그 이후 며칠간 계속 냉전을 유지했지만 말이다. 나는 지금 내 자신을 챙기기도 너무나 벅찼다. 너를 향한 마음은 언제나 여전했다. 하지만 너와 관련이 없는 모든 잡다한 생각들이 나를 너무나 지치게 해서, 항상 몸도 마음도 피곤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만 바라보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사회에서 버텨나가면서, 나도 모르게 너의 단점을 하나 둘씩 은연중에 하나하나 세기 시작했다. 아주 나쁜 버릇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그때의 주은찬은, 지금의 주은찬이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을 계속 하고 있었으니까.

 

  초반에는 내 안의 억울함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너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돈이 조금씩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수중에 있는 돈은 끽해야 두 달 정도의 월세를 낼만한 값어치를 했다. 공부에 조금 집중하고 싶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조만간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것이었는데, 조금 늦고 너를 마중 나가지 못한 이유로 너는 며칠간 나에게 토라져서 말도 걸지 않곤 했다. 나는 그런 너의 태도가 나도 모르게 마음 한편으로 너무나도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거기다가 덧붙여서, 하나가 틀어지니 여러 개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별것도 아닌 것에 속상해하고 사소한 것에 고개를 돌리는 너의 행동이 섭섭할 때도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너와 입장을 바꿔 조금만 생각을 바꿔보고, 너가 나에게 시선을 맞추고 조금만 나를 이해해준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결정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결국 한두 번씩 가지 않기 시작하던 너의 마중을 이제는 아주 당연하게도 그만뒀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더이상 너를 맞이하러 학원에 들르지 않았고, 너는 나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겉으로는 조금 한숨이 놓인다며, 쉴 시간이 조금이나마 생겨 다행이라는 나쁜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안으로는 섭섭해 할 너를 생각하면 마음이 문드러질 것만 같았다. 사실은 그랬다. 정말이지 속과 겉이 다른 모순된 생각들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 모든 것들이 산산조각 나버린 날을 이야기해보자면, 그날은 내가 역시나 너를 데리러 가지 않고 도서관에서 과제가 끝난 후 늦은 저녁 집에 들어간 날들 중 하루였다. 너가 혹시 또 삐쳐있지는 않을까,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에 조금은 지쳐 오늘은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못된 생각을 하던 중 눈치를 살피며 집을 들어갔을 때, 요즈음 찾아볼 수 없었던 후각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찔러왔다. 나도 모르게 무슨 일일까 괜스레 신발을 잽싸게 벗고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앞치마를 입은 채 저녁을 하고 있는 너가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에 멍하니 뒤에서 너를 바라보고 있는데, 의외로 아무렇지 않은 너가 나의 기척에 고개를 돌리며 왔어? 라고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주변의 슈퍼에 가서 식재료를 사 왔는지 싱크대 주변의 도마에는 국에 넣으려 송송 썰어놓은 파와 두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밥솥에서 뜨거운 김이 새어나오고, 너는 숟가락 두 개와 젓가락 두 쌍을 들어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가서 얼른 씻고 와, 저녁 먹자. 너는 고개를 들어 제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나는 그제서야 대답을 하며 화장실로 뛰어가듯 재빨리 들어갔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새하얘져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말을 잃은 채 너가 나를 부르기 전까지 한참이나 허공을 바라보며 넋 놓고 있을 뿐이었다.

 

  오래간만에 따뜻한 저녁밥을 먹은 후에는, 너와 나는 간만에 함께 일찍 침대에 누웠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조금이나마 날씨가 풀려 점점 쌀쌀해지는 가을로 접어들고 있는 날이었다. 예전에는 아주 당연했던 것들이 괜스레 지금 보니 너무나도 어색해서, 나는 등을 보이고 반대편을 누웠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들어 계속되던 다툼과 자존심 싸움이 우리 둘을 이렇게나 멀어지게 해버렸다는 것을 생각하니 조금 우스워졌다. 학교가 뭐라고. 일이 뭐라고. 현실이 뭐라고.

 

 

  "...주은찬,"

 

 

  그리고 나에게 한 발짝 발을 더 디뎌준 건 본의 아니게 너였다. 내 이름을 조그맣게 불러오는 너에게, 나는 조금 말을 잃고 어둠 속에서 눈만 깜박이다가, 입을 열어왔다.

 

 

  "응. 가람아."

 

 

  이 말 한마디 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을 법도 한데 너는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순간 맞닿은 등이 사라지며 너가 몸을 내 쪽으로 돌려왔다. 이불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너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 역시 너에게로 몸을 돌려왔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나를 바라보는 너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보는 너의 얼굴이다. 넌 항상 여전하구나. 항상 이 자리에서, 굳건히.

 

 

  "나, 콩쿨 나간다?"

 

 

  세계 각국에서 오는 거래. 조금 규모가 큰 대회인가 봐. 너는 의외로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그런 대회가 내 목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괜스레 코를 훌쩍이고는 재잘재잘 얘기를 하는 너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곤 했다. 간혹 이야기하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거나 하는 모습들을 보며 나는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묘한 기분이 들어서. 주은찬, 주은찬, 나를 부르는 너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오랜만에 듣는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너를 그리워했던 것 같아서. 너가 이제 졸립다며 두 눈을 내리감았을 때까지 나는 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결에 뒤척이는 너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눈을 가릴 것 같이 아슬아슬한 너의 앞머리를 손끝으로 살짝 옆으로 밀어두기도 하였다. 그렇게 나는 동틀 녘이 될 때까지 너를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 고작 30분 정도 잔 것 같은데 시끄럽게 알람이 울려 살짝 얼굴을 찡그리는 너의 등을 토닥이며 더 자라고 속삭이고는 침대에서 벗어났지 말이다.

 

 

 

 

 

  이후 나는 조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무언가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꼬박 밤을 새우고 학교에 간 탓에 조금 꾸벅꾸벅 졸다가, 어쩌다가 강의를 끝마치고 졸린 눈을 껌벅거리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걸음을 옮기고 있던 차였다. 무언가 빠르게 머릿속을 잽싸게 지나쳤다. 항상 알바가 없는 이 시간대에 학교에서 나오면,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아닌 너의 학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곤 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예전처럼 문앞에 서서 너를 기다리고 있으면, 과연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건네올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발걸음을 틀어 다른 버스로 몸을 실었다. 덜컹거리는 바퀴가, 내 몸을 흔들었다.

 

  이제 여름은 아예 지나가 버린 것 같았다. 은근하게 쌀쌀한 바람이 몸을 간지럽히는 것 같아서 조금 움츠렸다. 항상 봐와서 익숙한 학원을 올려다보았다. 웬일인지 커튼이 쳐져 있어 안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안에 없나? 왼쪽 손목에 차여있는 메탈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아직 레슨이 끝날 시간은 한참 멀었는데. 조금 초조하게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결국 문을 열고는, 너의 학원이 위치해 있는 이 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칸 한칸 계단을 타고 올라가고, 언제나 들어도 익숙하지 않은 운동화의 소리가 건물 안으로 울러 퍼졌다. 익숙한 복도를 지나고, 굳게 닫힌 학원 문고리에 손을 뻗었을 때는.

 

 

  "어?"

 

 

  문이 닫혀있었다. 불현듯 너의 얼굴이 눈앞에 펼쳐졌다. 분명 이 시간대면 학원이 끝날 시간인데. 너는 어디 갔을까. 한참이나 문 앞을 서성이다가, 내가 혹시나 잘못 짚지는 않았을까 싶어 다시 한 번 문고리를 열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조롱하는 듯 굳게 닫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람아."

 

 

  또 사라지려는 거니. 혹시 저번처럼 나에게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굳은 얼굴이 도저히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제자리에서 그렇게, 멍하니 바보같이 닫힌 문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몸을 뒤돌아 급한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가람아, 가람아. 익숙한 너의 이름을 입안에서 머금으며 뛰어다녔다. 웃기게도 왜 하필 이런 상황에, 짧았지만 너와 함께한 모든 추억들이 내 마음을 치고 일어섰다. 늦은 오후 버스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아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창문을 바라보던 너가 떠오르고,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시원한 버스의 에어컨 밑에 앉아 살 것 같은 표정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던 너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괜찮았는데. 되돌아오지 않는 이번 년도의 여름을 집에서만 보내는 건 아쉽다고 생각해 너와 떠난 여행이었는데, 왜 앞으로의 나의 여름 안에 너가 떠오르지 않는 걸까. 애석하게도.

 

  핸드폰도 없어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참 웃긴 것이, 이런 상황이 되자마자 후회와 미안함이 가득 담겨 내 자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핸드폰이라도 하나 쥐어줄걸. 이렇게 후회할 줄 알았으면 너의 말에 조금 귀 기울여 들을걸.

 

 

  '계속 평소처럼만 나를 대해줘.'

 

 

  너가 나에게 항상 하던 말이 문득 머릿속에 빠르게 지나쳤다. 새삼스럽게도, 이 말은 너가 얼마나 중요시하는 말인지 이제서야 깨달아버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번화가를 둘러봤는데도 불구하고 너의 얼굴은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조금씩 죄책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가는 이 모든 이유에 너가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왜 몰랐던 걸까. 하나하나 짚어보면 너가 완벽하게 내 것이 됐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씩 소홀히 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항상 너는 금방이라도 톡 건드리면 터져버릴 것 같은 비눗방울과도 같다고 생각해왔다. 마음만 먹으면 너는 나를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고 은연중에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너가 말도 없이 나를 떠나버릴 수도 있다고 나 자신에게 말하고, 또 말을 되풀이했었는데 말이다.

  

  덜컹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마지막 보류로 남겨두었던 집 분을 급하게 열어젖혔다.

 

 

  "가람아."

 

 

  현관문 앞에서, 혹여나 너가 욕실에 있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에 너의 이름을 불러왔다.

 

 

  "...가람아."

 

 

  다시 한 번 너를 불렀다. 없었다. 돌아오는 대답조차 없었다. 순간, 떨리는 온몸을 주체를 못 하며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주은찬?"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뭐야, 왜 그런 표정으로 서 있어?"

 

 

  쌀쌀해진 날씨에 베이지색 가디건을 걸치고, 손에는 가방 하나를 든 채 멀뚱한 얼굴로 내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너가 시야에 들어왔다. 한참이나 이상하게 나를 쳐다보는 너의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순식간에 긴장이 풀려 제자리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너의 신발 모퉁이로 시선을 돌렸다. 바보 같기는. 헛웃음을 치며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어디 가면, 말이라도 해주고 가야되. 알겠지?"

  "뭐야, 내가 언제부터 너한테 보고하면서 다녔다고."

 

 

  너는 소리 내어 기분 좋게 웃어왔다. 나 역시 긴장이 풀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이니 여기저기 정신없이 풀러 져 있는 운동화 끈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뛰느라 끈이 저절로 풀린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너는 한참이나 그렇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주저앉아있는 나에게로 손을 뻗어왔다. 나는 고개를 올려 들어 너를 바라보다가, 나에게로 뻗은 그 작은 손을 거리낌 없이 꽉 잡아왔다.

 

 

  "...오늘따라 왜 이래?"

 

 

  그리고 일어선 뒤에 허리를 굽히고는 뭉글게 고개를 밀어 입을 맞춰왔다. 현관문에 등이 살짝 부딪힌 너가 아프다며 징징거렸다. 너가 다시 돌아와서 다행이야... 붉어진 너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다시금 살짝 벌려져 있는 입술에 쪽, 하고 느릿하게 뭉갰다. 아까전에 청포도 사탕을 먹었는지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져와서, 나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지었다. 아아. 역시 나는 너 없이는 아닌가 봐. 지금까지의 내 행동들, 사과할께... 나는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여 너에게 밀착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발갛게 물든 너의 볼이 눈앞에 아주 가까이 보였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너는 알 틈이 없겠지만 나는 너를 다시 한 번 내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가볍게 끌려오는 너가, 아주 익숙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주은찬. ...나 머리 어때?"

 

 

  그리고 그 순간 너는 잠시 고개를 뒤로 빼며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힐끔 가리켜왔다. 어? 나는 나지막한 탄성을 뱉었다.

 

 

  "오늘 한 거야?"

 

 

  나는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켤을 쓰다듬어 내렸다. 눈을 매혹시키는 흑발은 온데간데없고, 밝은 애쉬빛이 감도는 새로운 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문득 고등학생 때의 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참이나 새로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너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왔다. 그리고는 다시금 속삭였다.

 

 

  "예뻐."

 

 

  다시 한 번.

 

 

  "항상, ...예뻐."

 

 

  현관문 앞에서 도대체 뭐 하는 건지. 나는 오래간만에 너의 허리를 끌어당겨 진득하게 입을 맞춰왔다. 야아...! 어깨를 주먹을 쥐어 아프지 않게 때리는 너를 향해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지어본 후에, 나는 너의 신발을 벗기고는 침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주은찬, 나 저녁 안 한다? 안 해? 뒷말을 살짝 더듬으며 당황한 듯 팔을 허우적거리는 너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히고는,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왔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은 청가람 아니었어?"

 

 

  눈을 살짝 흘기는 너를 바라보다가, 나는 기어코 웃음이 터졌다. 가람아... 너무나도 익숙한 너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러보며, 너의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들뜬 숨을 내뱉는 너를 응시하며 나는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예뻐. 나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너는 아직도 내 눈앞에 무척이나 밟힌다고.

 

  항상 무겁게만 느껴졌던 왼쪽 손목에 차여진 메탈시계가, 한순간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Eplilogue

 

 

  언제부터였을까, 너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가느른 두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어진 건. 몇 개월 전부터 항상 짧게 친 흑발 머리를 고집하며 뒷목에 제비초리를 드러내고 다니던 너는, 무슨 늦바람이 든건지 새하얀 피부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게 애쉬빛을 띄는 염색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났었다. 어때? 머쓱한 표정으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이 무척이나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너는, 염색을 한 지 며칠째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어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너의 고등학교 시절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새로운 머리가 너무나도 마음에 쏙 들었던 것 같다. 너가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내가 기억 속에서 잊어버린 그 이유 때문인지 바보같이 눈치도 못 채고.

 

 

  "예뻐,"

 

 

   뒷목을 아찔하게 스치는 머릿결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잠이 들어버린 너의 귓가에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이 볼품없이 작은 중고의 침대에서 뭐가 그리 좋다고 내 무릎을 베고는 이렇게 예쁜 모습으로 새근새근 꿈나라로 가버린건지. 반소매를 입은 너가 조금 추울 것 같아 배까지만 덮여있는 보라색 두터운 담요를 끌어당겨 마른 어깨까지 감싸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너가 잠결에 뒤척이다가 목 주위가 다 늘어난 티셔츠 사이로 붉게 물들여진 정체 모를 자국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든 신경이 한쪽으로 쏠린 나는 행동을 멈추고, 조금 좌절한다.

 

 

  "...가람아,"

 

 

  너의 이름을 입에 머금고 지그시 불러본다.

 

 

  "대체 왜..."

 

 

  퀘퀘한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미세하게 찌르는 이 좁은 원룸 안에서는, 쉴 틈도 없이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만 방 안을 가로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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