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Lady

part. 4 完

(주은찬 x 청가람)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뜨거운 열기와 함께 여름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몇 년을 써왔음에도 불구하고 덜덜거리면서 양옆으로 잘만 돌아가는 선풍기에서는 더이상 시원한 바람이 아닌 더운 바람을 만들어냈고, 부채를 부치는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 빨라져서 그나마 더운 공기를 애써 쫓아내고 있었다.

 

 

  "...더워,"

 

 

  얇은 티셔츠를 입은 채 배를 까고 훌러덩 누워있던 너가 작게 투덜거리며 옆에 덩달아 누워있는 내 옆구리를 콕콕 찔러댔다. 주은차안, 말 뒷꼬리를 늘리며 은근 나를 재촉하는 손짓에, 나는 왼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들어 얼굴을 향해 부쳐주었다. 그제서야 두 눈을 감으며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는 너가 꽤나 귀여워서, 나는 더욱 손에 힘을 실었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너는, 시작된 살인적인 여름 날씨에 적응하지 못해 온종일 내내 조금이나마 차가운 집 바닥에 등을 딱 붙이고 뒹굴거리곤 했다. 이번 달에는 돈이 조금 남아 사다 놓은 수박도 하나 두 개 오물거리더니 시원하다며 반 통을 그 자리에서 비우는 걸 보고 깜짝 놀라 뺏은 기억도 있었다.

 

  너와 함께 맞는 첫 여름은 꽤나 기분이 묘했다. 결코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던 고등학교 졸업도 이미 지난 지 벌써 몇 개월이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의 긴 시간 동안 나는 너와 줄곧 함께했다. 너가 우리 집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선물처럼 혹시나 금방이라도 다시 사라져버릴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의 기간들이 없었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다. 좁은 침대의 내 옆자리에 누워 어여쁜 두 눈을 감고 자는 너의 모습도 마치 현실이 아닌 것 같아서 항상 자다 깨다 너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너를 끌어안고 잠을 청하는 것이 일상이 돼버렸다. 너는 그 날을 중심으로 나에게 돌아온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 역시 너에게 꼬치꼬치 이유를 캐묻지도 않았다. 나는 너가 나에게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졸업이 나를 찾아온 것뿐만 아니라 어른이라는 단어 아래의 책임감도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저 어떻게든 살다가 어디서 콱 죽어야겠다는 어린 시절의 생각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어쨌든 세상 흘러가는 모습은 알아야겠다 싶어서 대학교도 진학했다. 또한 항상 어김없이 나를 몹시나 괴롭게 하는 왼쪽 손목의 메탈시계도 너가 내 옆에 있으면 잊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도, 들키지도 않은 나 혼자만 알고 있던 흉을, 너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곤 했다. 너는 딱히 특별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래서 안심이 됐다. 정말 우습게도.

 

  하지만 딱히 어른이 되어도 생활패턴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한 가지 달라진 사실이 있다면 너는 여전히 그 학원에 다녔고, 나는 하루의 수강이 마치면 너의 학원 앞에서 너를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루는 레슨이 길어져서 늦게 끝나 학원 안에 들어와 너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항상 들려오는 익숙한 클래식의 음악 소리가 천천히 끊겨오고, 두 명의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커지더니, 갈아입기 귀찮다며 무용복 위에 나의 점퍼를 하나 걸친 너가 문을 열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하얀 피부에 어울리는 너의 무용복이 꽤나 잘 어울려서 나는 한참이나 머리가 띵해서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왜 그러냐는 너의 말에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로 손을 뻗었다. 너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주머니에 넣어있는 반대쪽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내 손을 맞잡아왔다. 갈게요! 순간 너는 고개를 뒤로 돌리고는 손을 흔들며 인사해왔다. 그리고 문에 기대어 서 있던 장발의 남자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저번에 만났던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남자는 먼저 작은 미소를 지어왔다. 나는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운 눈빛으로 응답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내 손을 잡은 채, 배고프다며 투정부리는 너의 뒤통수를 내 품으로 끌어당기면서 말이다.

 

  창문 밖으로는 잠자리들이 서로 술래잡기를 하듯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었고, 저 멀리 나무들에서는 매미들의 떼창이 시끄럽게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더위를 그다지 타지 않는 나 역시 뜨거운 습기와 열기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하물며 더위를 많이 타는 너가 방바닥에 엎어져 시체놀이를 하고 있는 건 그닥 놀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순간, 나는 몸을 벌떡 세워 앉았다. 신경질 나는 앞머리를 대충 뒤로 넘겨버리고, 이어서 흐물거리는 너의 등을 잡아 올려 일으켰다. 꽤나 불쾌함이 묻어있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너에게 어서 일어나라며 재촉했다. 너는 몹시나 짜증 난다는 얼굴로 갑자기 일어난 일에 뭐를 할 거냐며 물었지만 나는 그저 너의 손을 이끌고 가서 신발을 신기기에 정신이 팔렸다. 흰 티셔츠에 반청바지를 입고는 쪼리를 신은 너는 영락없이 여름을 나고 있는 익숙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문단속을 두어 번 하고, 나는 지갑 하나만 주머니에 넣은 채 너를 이끌며 동네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딜 가느냐며 연신 되묻는 너에게 그저 작은 웃음으로 답변을 하고, 발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여름의 모든 것이 묻어있는, 그곳으로 말이다.

 

  사람이 적은 곳을 다행히 잘 찾아서 그런지, 바다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짭조름하지만 시원한 바닷바람에 너는 숨을 죽이고 멀리 시선을 던졌다. 그런 너가 새로워서 나는 한참이나 바다를 바라보는 너를 내버려두었다. 햇빛 아래 빛나는 너의 깔끔하게 정리된 흑발의 머리와, 워낙 마른 탓에 허해 보이는 목덜미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게 너는 뜨겁지도 않은 듯 발가락 사이로 밀려 들어오는 바닷물을 장난치며 놀았다. 어둑어둑해져 노을이 저 멀리 보일 때까지, 그렇게. 

 

  몇 시간 동안이나 혼이 빠지게 바다에 머물러있던 우리는, 조금 어두워진 탓에 바다 바로 앞에 있는 작은 펜션에 방을 하나 빌렸다. 얇은 이불과 베개, 바다가 잘 보이는 큰 창문까지 확인한 너는 조금 신이 난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밖은 어두워지고, 우리는 주변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는 다시 돌아온 터였다. 얇게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하루종일 있었던 바쁜 일과에 너는 지친 듯 이불을 깔고 몸을 스트레칭 하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보는 너의 모습은 새삼스럽게도 정말이지 새로웠다. 사실 항상 너는 새롭다. 몸을 녹아버릴 것 같은 살인적인 더위처럼. 너는.

 

 

  "주은찬,"

 

 

  너는 내 이름을 불러왔다. 옆자리를 손으로 팡팡 치며 이리 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잘 거야?"

  "음...조금 이따가?"

 

 

  낮보다는 시원해진 날씨가 맘에 들은 듯 너는 창문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등진 채 대답을 해왔다. 그래, 이따가 같이 자자. 나는 수건을 의자에 걸어놓으며 방 불을 끄고 나서는 너가 깔아놓은 이불 옆에 몸을 뉘었다. 어둠이 방을 삼키자마자 무섭게도 침묵이 우리 둘을 감싸 안았다. 그렇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다가, 손으로 고개를 바치고는 너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순간 너와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주은찬,"

 

 

  너는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불렀다. 조금 흔들리는 말끝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응. 짧게 대답을 해왔다.

 

 

  "우리, 무슨 사이일까."

 

 

  조금 침묵이 흘렀다. 창문 밖에서 파도소리가 미세하게 흘러들어왔다. 나는 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줄곧 너를 바라보았다.

 

 

  "...무슨 사이이긴."

 

 

  나는 쓴웃음을 지어보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이 없는 우리 사이를, 꼭 정의내려야만 하는 걸까. 너의 조금씩 떨리는 두 깊은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 둘은 서로의 시선을 결코 피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너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리고 나는,

 

 

  "......"

 

 

  더위를 먹은 것 같았다. 얼굴을 천천히 너의 쪽으로 가까이 하고, 입술을 슬며시 갖다 대었다. 부드럽고 뜨거운 무언가가 입술에 진득이 닿았다가 빠르게 떨어졌다. 너와 시선이 순간 마주쳤다. 너는 나를 바라보며 설명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두 눈을 감고 입술을 다시 한 번 맞춰왔다. 손을 뻗어 너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너의 위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너의 몸 사이에 다리를 지탱하고 입술을 짓눌렀다. 고른 치아와 말캉한 무언가가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손을 내려 너의 팔을 지그시 훑어 내렸다.

 

 

  "...가람아,"

 

 

  입술을 떼고, 살짝 달아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는 너의 얼굴이 달빛 아래 고르게 내비쳤다. 내 한 손에 깍지를 끼고 있는 너의 촉감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너의 배 언저리를 만지며 땀에 송글송글 맺힌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가람아..."

 

 

  뜨거운 것이 맞닿고, 다리를 벌려 내 허리를 세차게 감싸오는 너의 행동에 나는 너에게 손을 뻗기 시작했다.

 

 

  "아,아...주은찬..."

 

 

  둘다 아무래도 심한 더위를 먹은 듯싶었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긋지긋하기도 하지만, 가끔 시원했던 그런 끈적한 여름이.

 

 

 

 

 

  너는 언젠가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렇게 두꺼운 메탈시계 차고 다니면, 여름에 덥지 않아?'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신기한 듯 내 왼손을 붙잡고 이리저리 바라보는 너에게 나는 항상 그저 웃음으로 답하곤 했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으면, 툭 튀어나온 입술에 갑작스럽게 짧은 키스를 해주고는 당황스러워하는 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주은찬, 넌 너무 나한테 숨기는 게 많아.'

 

 

  그래서 삐졌어? 살짝 눈을 흘기는 너를 내 품에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평생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너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간지럽다며 내 등을 팡팡 치는 너의 행동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너의 앞에서 움츠러들어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나의 모습이, 언젠가는 산산조각이 나서 깨져버릴 날이 결코 멀지 않았다고. 

 

  그리고 생각외로 너와 나의 마음만으로도 모든 것을 충분히 채워주지는 않은 듯했다. 시선을 뻗어 현실을 직시하자마자 너와 마주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름이 지나가고 언제부턴가 대학교 주변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고등학교 때와 1학기 때 소홀히 해왔던 밀린 공부를 시작하려니 하루에 24시간으로 턱없이 부족했다. 거기다가 관심은 하나도 없었지만 동기 때문에 얼떨결에 들은 동아리 활동과 이어지는 술자리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나서 제일 먼저 달라진 사실은, 학원 레슨이 끝난 너를 항상 기다리는 입장이었던 내가 너로부터 마중을 받게 된 것이었다. 학교와 학원이 조금 시간이 걸리는 거리인지라, 너를 맞이하러 가는 시간에서 나는 조금씩 티 나지 않게 지각하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숨을 몰아쉬며 뛰다 보면, 학원 앞에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너에게로 뛰어가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던지던 너는 익숙한 얼굴로 시선을 올리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뭐하다 늦었어?"

  "미안, 미안. 알바가 조금 늦게 끝나서."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나에게 살짝 눈을 흘기고는, 너는 유유히 앞장을 서서 뒷짐 쥐며 걷기 시작했다. 그런 너의 모습을 보며 나는 너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까지는 너의 투정부림이,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하지만 기간은 짧았다. 계속되는 과제와 스트레스만 쌓이는 조별과제, 이어지는 술자리들이 나를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발에 부리나케 아르바이트를 하러 걸음을 옮기고, 밤을 새워 과제를 마치고 학교에 가기 전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의 숙면을 취하다 보니 이러다가 정말 어디 길 걸어가다 픽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는 너를 '덜'챙기기 시작했다. 정말 피곤한 날에는, 레슨이 끝난 너를 데리러 가는 우리의 암묵적으로 동의한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런 날은 말 그대로 집에 냉기가 돌았다. 밤늦게 일이 끝나 피곤이 묻어있는 얼굴을 한 채 집을 들어와도, 너는 매정하게도 나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먼저 잠이 들어있곤 했다. 너는 나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그 작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내가 미워서, 괜히 깨어있다가 사소한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큰 것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사실 처음 내가 너와의 약속을 깬 날에는, 집에 먼저 들어와 있는 너는 내가 들어와도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은 채 투명인간 취급을 하곤 했다. 온종일 공부와 일에 시달린 탓에 진이 다 빠져서 지친 내가 너의 기분을 풀어주려 애써 말을 건네봐도, 티비에만 시선을 집중한 채 내 말은 듣는 척도 안 하는 너의 모습이 처음으로 미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급기야 너가 이해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 서운했던 내가 그만 화 좀 풀어, 라며 툭 말을 던지면 너는 너무나도 얄밉게 대답을 했다.

 

 

  "나 화 안 났는데?"

 

 

  라고. 결국 너를 포기하고 침대에 드러누운 내 행동 때문에 그 이후 며칠간 계속 냉전을 유지했지만 말이다. 나는 지금 내 자신을 챙기기도 너무나 벅찼다. 너를 향한 마음은 언제나 여전했다. 하지만 너와 관련이 없는 모든 잡다한 생각들이 나를 너무나 지치게 해서, 항상 몸도 마음도 피곤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만 바라보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사회에서 버텨나가면서, 나도 모르게 너의 단점을 하나 둘씩 은연중에 하나하나 세기 시작했다. 아주 나쁜 버릇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그때의 주은찬은, 지금의 주은찬이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을 계속 하고 있었으니까.

 

  초반에는 내 안의 억울함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너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돈이 조금씩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수중에 있는 돈은 끽해야 두 달 정도의 월세를 낼만한 값어치를 했다. 공부에 조금 집중하고 싶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조만간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것이었는데, 조금 늦고 너를 마중 나가지 못한 이유로 너는 며칠간 나에게 토라져서 말도 걸지 않곤 했다. 나는 그런 너의 태도가 나도 모르게 마음 한편으로 너무나도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거기다가 덧붙여서, 하나가 틀어지니 여러 개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별것도 아닌 것에 속상해하고 사소한 것에 고개를 돌리는 너의 행동이 섭섭할 때도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너와 입장을 바꿔 조금만 생각을 바꿔보고, 너가 나에게 시선을 맞추고 조금만 나를 이해해준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결정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결국 한두 번씩 가지 않기 시작하던 너의 마중을 이제는 아주 당연하게도 그만뒀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더이상 너를 맞이하러 학원에 들르지 않았고, 너는 나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겉으로는 조금 한숨이 놓인다며, 쉴 시간이 조금이나마 생겨 다행이라는 나쁜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안으로는 섭섭해 할 너를 생각하면 마음이 문드러질 것만 같았다. 사실은 그랬다. 정말이지 속과 겉이 다른 모순된 생각들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 모든 것들이 산산조각 나버린 날을 이야기해보자면, 그날은 내가 역시나 너를 데리러 가지 않고 도서관에서 과제가 끝난 후 늦은 저녁 집에 들어간 날들 중 하루였다. 너가 혹시 또 삐쳐있지는 않을까,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에 조금은 지쳐 오늘은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못된 생각을 하던 중 눈치를 살피며 집을 들어갔을 때, 요즈음 찾아볼 수 없었던 후각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찔러왔다. 나도 모르게 무슨 일일까 괜스레 신발을 잽싸게 벗고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앞치마를 입은 채 저녁을 하고 있는 너가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에 멍하니 뒤에서 너를 바라보고 있는데, 의외로 아무렇지 않은 너가 나의 기척에 고개를 돌리며 왔어? 라고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주변의 슈퍼에 가서 식재료를 사 왔는지 싱크대 주변의 도마에는 국에 넣으려 송송 썰어놓은 파와 두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밥솥에서 뜨거운 김이 새어나오고, 너는 숟가락 두 개와 젓가락 두 쌍을 들어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가서 얼른 씻고 와, 저녁 먹자. 너는 고개를 들어 제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나는 그제서야 대답을 하며 화장실로 뛰어가듯 재빨리 들어갔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새하얘져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말을 잃은 채 너가 나를 부르기 전까지 한참이나 허공을 바라보며 넋 놓고 있을 뿐이었다.

 

  오래간만에 따뜻한 저녁밥을 먹은 후에는, 너와 나는 간만에 함께 일찍 침대에 누웠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조금이나마 날씨가 풀려 점점 쌀쌀해지는 가을로 접어들고 있는 날이었다. 예전에는 아주 당연했던 것들이 괜스레 지금 보니 너무나도 어색해서, 나는 등을 보이고 반대편을 누웠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들어 계속되던 다툼과 자존심 싸움이 우리 둘을 이렇게나 멀어지게 해버렸다는 것을 생각하니 조금 우스워졌다. 학교가 뭐라고. 일이 뭐라고. 현실이 뭐라고.

 

 

  "...주은찬,"

 

 

  그리고 나에게 한 발짝 발을 더 디뎌준 건 본의 아니게 너였다. 내 이름을 조그맣게 불러오는 너에게, 나는 조금 말을 잃고 어둠 속에서 눈만 깜박이다가, 입을 열어왔다.

 

 

  "응. 가람아."

 

 

  이 말 한마디 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을 법도 한데 너는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순간 맞닿은 등이 사라지며 너가 몸을 내 쪽으로 돌려왔다. 이불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너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 역시 너에게로 몸을 돌려왔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나를 바라보는 너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보는 너의 얼굴이다. 넌 항상 여전하구나. 항상 이 자리에서, 굳건히.

 

 

  "나, 콩쿨 나간다?"

 

 

  세계 각국에서 오는 거래. 조금 규모가 큰 대회인가 봐. 너는 의외로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그런 대회가 내 목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괜스레 코를 훌쩍이고는 재잘재잘 얘기를 하는 너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곤 했다. 간혹 이야기하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거나 하는 모습들을 보며 나는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묘한 기분이 들어서. 주은찬, 주은찬, 나를 부르는 너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오랜만에 듣는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너를 그리워했던 것 같아서. 너가 이제 졸립다며 두 눈을 내리감았을 때까지 나는 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결에 뒤척이는 너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눈을 가릴 것 같이 아슬아슬한 너의 앞머리를 손끝으로 살짝 옆으로 밀어두기도 하였다. 그렇게 나는 동틀 녘이 될 때까지 너를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 고작 30분 정도 잔 것 같은데 시끄럽게 알람이 울려 살짝 얼굴을 찡그리는 너의 등을 토닥이며 더 자라고 속삭이고는 침대에서 벗어났지 말이다.

 

 

 

 

 

  이후 나는 조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무언가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꼬박 밤을 새우고 학교에 간 탓에 조금 꾸벅꾸벅 졸다가, 어쩌다가 강의를 끝마치고 졸린 눈을 껌벅거리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걸음을 옮기고 있던 차였다. 무언가 빠르게 머릿속을 잽싸게 지나쳤다. 항상 알바가 없는 이 시간대에 학교에서 나오면,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아닌 너의 학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곤 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예전처럼 문앞에 서서 너를 기다리고 있으면, 과연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건네올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발걸음을 틀어 다른 버스로 몸을 실었다. 덜컹거리는 바퀴가, 내 몸을 흔들었다.

 

  이제 여름은 아예 지나가 버린 것 같았다. 은근하게 쌀쌀한 바람이 몸을 간지럽히는 것 같아서 조금 움츠렸다. 항상 봐와서 익숙한 학원을 올려다보았다. 웬일인지 커튼이 쳐져 있어 안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안에 없나? 왼쪽 손목에 차여있는 메탈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아직 레슨이 끝날 시간은 한참 멀었는데. 조금 초조하게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결국 문을 열고는, 너의 학원이 위치해 있는 이 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칸 한칸 계단을 타고 올라가고, 언제나 들어도 익숙하지 않은 운동화의 소리가 건물 안으로 울러 퍼졌다. 익숙한 복도를 지나고, 굳게 닫힌 학원 문고리에 손을 뻗었을 때는.

 

 

  "어?"

 

 

  문이 닫혀있었다. 불현듯 너의 얼굴이 눈앞에 펼쳐졌다. 분명 이 시간대면 학원이 끝날 시간인데. 너는 어디 갔을까. 한참이나 문 앞을 서성이다가, 내가 혹시나 잘못 짚지는 않았을까 싶어 다시 한 번 문고리를 열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조롱하는 듯 굳게 닫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람아."

 

 

  또 사라지려는 거니. 혹시 저번처럼 나에게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굳은 얼굴이 도저히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제자리에서 그렇게, 멍하니 바보같이 닫힌 문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몸을 뒤돌아 급한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가람아, 가람아. 익숙한 너의 이름을 입안에서 머금으며 뛰어다녔다. 웃기게도 왜 하필 이런 상황에, 짧았지만 너와 함께한 모든 추억들이 내 마음을 치고 일어섰다. 늦은 오후 버스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아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창문을 바라보던 너가 떠오르고,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시원한 버스의 에어컨 밑에 앉아 살 것 같은 표정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던 너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괜찮았는데. 되돌아오지 않는 이번 년도의 여름을 집에서만 보내는 건 아쉽다고 생각해 너와 떠난 여행이었는데, 왜 앞으로의 나의 여름 안에 너가 떠오르지 않는 걸까. 애석하게도.

 

  핸드폰도 없어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참 웃긴 것이, 이런 상황이 되자마자 후회와 미안함이 가득 담겨 내 자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핸드폰이라도 하나 쥐어줄걸. 이렇게 후회할 줄 알았으면 너의 말에 조금 귀 기울여 들을걸.

 

 

  '계속 평소처럼만 나를 대해줘.'

 

 

  너가 나에게 항상 하던 말이 문득 머릿속에 빠르게 지나쳤다. 새삼스럽게도, 이 말은 너가 얼마나 중요시하는 말인지 이제서야 깨달아버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번화가를 둘러봤는데도 불구하고 너의 얼굴은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조금씩 죄책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가는 이 모든 이유에 너가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왜 몰랐던 걸까. 하나하나 짚어보면 너가 완벽하게 내 것이 됐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씩 소홀히 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항상 너는 금방이라도 톡 건드리면 터져버릴 것 같은 비눗방울과도 같다고 생각해왔다. 마음만 먹으면 너는 나를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고 은연중에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너가 말도 없이 나를 떠나버릴 수도 있다고 나 자신에게 말하고, 또 말을 되풀이했었는데 말이다.

  

  덜컹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마지막 보류로 남겨두었던 집 분을 급하게 열어젖혔다.

 

 

  "가람아."

 

 

  현관문 앞에서, 혹여나 너가 욕실에 있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에 너의 이름을 불러왔다.

 

 

  "...가람아."

 

 

  다시 한 번 너를 불렀다. 없었다. 돌아오는 대답조차 없었다. 순간, 떨리는 온몸을 주체를 못 하며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주은찬?"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뭐야, 왜 그런 표정으로 서 있어?"

 

 

  쌀쌀해진 날씨에 베이지색 가디건을 걸치고, 손에는 가방 하나를 든 채 멀뚱한 얼굴로 내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너가 시야에 들어왔다. 한참이나 이상하게 나를 쳐다보는 너의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순식간에 긴장이 풀려 제자리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너의 신발 모퉁이로 시선을 돌렸다. 바보 같기는. 헛웃음을 치며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어디 가면, 말이라도 해주고 가야되. 알겠지?"

  "뭐야, 내가 언제부터 너한테 보고하면서 다녔다고."

 

 

  너는 소리 내어 기분 좋게 웃어왔다. 나 역시 긴장이 풀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이니 여기저기 정신없이 풀러 져 있는 운동화 끈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뛰느라 끈이 저절로 풀린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너는 한참이나 그렇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주저앉아있는 나에게로 손을 뻗어왔다. 나는 고개를 올려 들어 너를 바라보다가, 나에게로 뻗은 그 작은 손을 거리낌 없이 꽉 잡아왔다.

 

 

  "...오늘따라 왜 이래?"

 

 

  그리고 일어선 뒤에 허리를 굽히고는 뭉글게 고개를 밀어 입을 맞춰왔다. 현관문에 등이 살짝 부딪힌 너가 아프다며 징징거렸다. 너가 다시 돌아와서 다행이야... 붉어진 너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다시금 살짝 벌려져 있는 입술에 쪽, 하고 느릿하게 뭉갰다. 아까전에 청포도 사탕을 먹었는지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져와서, 나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지었다. 아아. 역시 나는 너 없이는 아닌가 봐. 지금까지의 내 행동들, 사과할께... 나는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여 너에게 밀착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발갛게 물든 너의 볼이 눈앞에 아주 가까이 보였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너는 알 틈이 없겠지만 나는 너를 다시 한 번 내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가볍게 끌려오는 너가, 아주 익숙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주은찬. ...나 머리 어때?"

 

 

  그리고 그 순간 너는 잠시 고개를 뒤로 빼며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힐끔 가리켜왔다. 어? 나는 나지막한 탄성을 뱉었다.

 

 

  "오늘 한 거야?"

 

 

  나는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켤을 쓰다듬어 내렸다. 눈을 매혹시키는 흑발은 온데간데없고, 밝은 애쉬빛이 감도는 새로운 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문득 고등학생 때의 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참이나 새로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너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왔다. 그리고는 다시금 속삭였다.

 

 

  "예뻐."

 

 

  다시 한 번.

 

 

  "항상, ...예뻐."

 

 

  현관문 앞에서 도대체 뭐 하는 건지. 나는 오래간만에 너의 허리를 끌어당겨 진득하게 입을 맞춰왔다. 야아...! 어깨를 주먹을 쥐어 아프지 않게 때리는 너를 향해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지어본 후에, 나는 너의 신발을 벗기고는 침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주은찬, 나 저녁 안 한다? 안 해? 뒷말을 살짝 더듬으며 당황한 듯 팔을 허우적거리는 너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히고는,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왔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은 청가람 아니었어?"

 

 

  눈을 살짝 흘기는 너를 바라보다가, 나는 기어코 웃음이 터졌다. 가람아... 너무나도 익숙한 너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러보며, 너의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들뜬 숨을 내뱉는 너를 응시하며 나는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예뻐. 나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너는 아직도 내 눈앞에 무척이나 밟힌다고.

 

  항상 무겁게만 느껴졌던 왼쪽 손목에 차여진 메탈시계가, 한순간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Eplilogue

 

 

  언제부터였을까, 너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가느른 두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어진 건. 몇 개월 전부터 항상 짧게 친 흑발 머리를 고집하며 뒷목에 제비초리를 드러내고 다니던 너는, 무슨 늦바람이 든건지 새하얀 피부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게 애쉬빛을 띄는 염색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났었다. 어때? 머쓱한 표정으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이 무척이나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너는, 염색을 한 지 며칠째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어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너의 고등학교 시절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새로운 머리가 너무나도 마음에 쏙 들었던 것 같다. 너가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내가 기억 속에서 잊어버린 그 이유 때문인지 바보같이 눈치도 못 채고.

 

 

  "예뻐,"

 

 

   뒷목을 아찔하게 스치는 머릿결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잠이 들어버린 너의 귓가에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이 볼품없이 작은 중고의 침대에서 뭐가 그리 좋다고 내 무릎을 베고는 이렇게 예쁜 모습으로 새근새근 꿈나라로 가버린건지. 반소매를 입은 너가 조금 추울 것 같아 배까지만 덮여있는 보라색 두터운 담요를 끌어당겨 마른 어깨까지 감싸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너가 잠결에 뒤척이다가 목 주위가 다 늘어난 티셔츠 사이로 붉게 물들여진 정체 모를 자국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든 신경이 한쪽으로 쏠린 나는 행동을 멈추고, 조금 좌절한다.

 

 

  "...가람아,"

 

 

  너의 이름을 입에 머금고 지그시 불러본다.

 

 

  "대체 왜..."

 

 

  퀘퀘한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미세하게 찌르는 이 좁은 원룸 안에서는, 쉴 틈도 없이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만 방 안을 가로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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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Lady

part. 3

(청가람 ver.)

*현오가람 요소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의 시절을 기억해보라 하면, 우습게도 한편의 기억을 잃어버린 듯 띄엄띄엄 모든 것들이 끊겨 있기 일쑤였다. 그리 꼼꼼한 성격이나 또 기록해 놓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어릴 적 기억이라고는 항상 '혼자'였다는 특징밖에 찾을 수가 없었다. 날이 저물며 모친이라는 사람들이 제 아이들을 하나둘씩 집으로 손잡고 데려갈 때도 나는 항상 그네에 몸을 싣고 마지막까지 남아있곤 했다.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을 홀로 남아 시간을 때웠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외롭다거나, 또 저 친구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해본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혼자인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규제받거나 규칙을 지키거나 하는 결코 그런 미지근한 성격은 아니었기에.

 

  조금 더 살을 붙여서 말해보자면, 나는 정말이지 집이란 곳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가증스러워했다. 초등학생 때도 필통 하나 들은 책가방을 메고 항상 다른 곳에서 시간을 때웠다. 학교 옆에 있는 떡볶이집에 가서 어쩌다가 놀이터 그네 밑에서 주운 오백 원을 하나 내밀고는, 테이블에 혼자 앉아 하나하나 아껴먹으며 시간을 때우기도 하고, 바로 옆에 있는 오락실에 가서 6학년 형들이 신나게 하는 게임을 물끄러미 뒤에서 바라보기도 하였다. 벌써부터 어린 나이에 집은 돌아가야 할 공간이 아닌 제 발로 들어가면 생지옥이라는 사실을 이미 깨달은 것이었다.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술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그 흔히 말하는 알콜 중독자였다. 평소에는 너무나도 멀쩡하다가, 술만 들어가면 사람이 난폭해지고 어김없이 앞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둘렀다. 아주 늦은 밤에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들어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의 이름이 튀어나오면, 나는 항상 방으로 뛰쳐들어가 문을 잠그고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두 귀를 꽉 막곤했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어둠이 나를 삼켜버리기를 중얼거리면서.

 

 

  "가람아,"

 

 

  쿵쿵거리는 그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입술을 콱 깨물고 몸을 웅크렸다. 죽어버려. 죽어버려, 온몸을 족쇄로 조이는듯한 기분에 허우적거리며 어린 나는 싫다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억지로 비집어 열린 문을 발로 열어젖히고,

 

 

  "우리 가람이 어디 갔을까?"

 

 

  겁에 질려 공포감에 몸을 벌벌 떨고 있는 아이의 머리채를 한 움큼 쥐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기 일쑤였다. 그 뒤로는 무섭게도 기억이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린 듯 사라져버린다. 작은 몸을 웅크려 있는 내 앞에 서서, 그 커다란 몸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것만 희미하게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항상 패턴은 같았다. 나는 과거도, 앞으로의 미래에도 항상 같을 것이라는 걸 은연중에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무엇도 행동을 실행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가진 것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었고, 증오의 굴레에서 허우적거리고 발버둥 쳐봤지만 아무도 나에게 동정의 눈길조차 건네질 않았다. 나는 온몸을 아빠에게 맡겼다. 죽어버려. 단지 이 한 단어만 끓어오르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아빠가 낮에 알콜 기운에 취해 잠에 골아있으면, 밤에는 얼굴 한번 비춰주지 않는 엄마가 항상 집에 들어오곤 했다. 그리고 엄마의 손에는 모르는 남자가 깍지를 끼고 함께 뒤따라 들어왔다. 입을 꾹 다물고 소파 앞에 앉아 엄마에게로 시선을 돌아보면, 붉은 루주를 바르고 짙은 화장을 한 엄마가 가지런한 이를 보이고 씩 웃어 보이며 나의 손에 항상 간식을 건네주었다. 두 손으로 엄마가 주는 간식을 소중히 품에 안고, 소파로 다시 걸어가 항상 즐겨보던 티비 프로를 시청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한 번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쉿, 하고 제스쳐를 취한 엄마는, 모르는 아저씨를 손에 이끌고 아빠가 없는 다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문이 닫히는 동시에 엄마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오고, 이어서 귀를 찢어버릴 것같이 흉측한 소리가 집 안에서 울러 퍼졌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섞인 고통의 메아리. 어린 나는, 그저 티비의 볼륨을 최대한 크게 올려놓고 주변의 상황은 배척한 채 온 시선을 티비에만 집중하곤 했다. 엄마가 건네준 간식을 하나하나, 천천히 오물거리면서.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간식들은 다 하나같이 불량식품이었던 것 같다. 슈퍼 계산대 앞에서 파는 아폴로니, 과일 향 나는 풍선껌 아니면 쫀드기 따위들 말이다.  

 

  머리가 하나 더 크고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나는 항상 소위 말하는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리곤 했다. 물론 처음에는 이 애들이 무슨 애들인지, 무엇을 하는 아이들인지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저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이라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동질감이 들어서, 나는 이 아이들에게 더욱 의지하기 시작했다. 학교의 선생님들과 반 아이들한테는 어울리면 좋지 않은 질 나쁜 아이들이라고 평가됐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누구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의 기준은 누구나 다르기 마련이니까.

 

  나는 녀석들을 알게 된 시점으로부터 조금씩 숨을 트기 시작했다. 녀석들과 어울려 다니며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처음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중학교를 겨우겨우 졸업하고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고등학교로 배정된 후에 만난 새로운 친구들로 인해-, 당신을 만났다. 나 아는 형이 춤 전공하는데, 웬만한 사람들보다 잘 춰.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으로 그래? 라고만 대답했다가, 당신을 만나고, 처음으로 조금은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한 그것이- 결국 내 발목을 쥐어 잡게 된 것이었다.

 

  그때가 당신을 처음 만난 시기였다.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반대의 다정한 성격에 조곤조곤한 말투가 내 마음에 쏙 들어서,

 

 

  "이름이 뭐니?"

 

 

  낯을 많이 가리는 내가 주머니 안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며 아무 말을 못 할 때도,

 

 

  "얼굴처럼 이름도 예쁘네."

 

 

  놀란 눈으로 당신을 올려다 봤을 때도,

 

 

  "난 현오야.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두되."

 

 

 

  난생처음으로 귓가에 들릴 정도로 정신없이 뛰는 심장 소리에 주체를 못 하고 벙어리가 되어 당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반응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도 모른 채.

 

  이후 당신은,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나를 누구보다도 친동생처럼 잘 챙겨주었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춤을 전공하고 있다는 당신의 학원에 몇 번 놀러 가기도 하고, 졸려 죽겠는 정신을 부여잡고 야간 편의점 알바를 해 번 돈으로 밥 사주겠다며 됐다는 당신을 이끌고 가보기도 하고 나는 점점 당신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나면 당신의 학원으로 쏜살같이 달려가고, 가끔 정말 집에 들어가기 싫은 날에는 조르고 졸라서 당신의 침대에서 함께 잠을 청하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참 민폐인 행동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같이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나를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받아줬던 걸까.

 

  하루는 그랬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유독 요즘 들어 심해진 아빠라는 작자의 행동에 진절머리가 나서. 사실 오늘만큼은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핑 도는 눈물을 눈을 깜박이며 내쫓던 날이었다. 놀이터 그네에 앉아 앞뒤로 움직이는 놀이기구에 몸을 맡기다가, 문득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며칠간 대회 준비로 바쁘다 해서 얼굴 한번 보질 못했는데, 왜 하필이면 오늘이 돼서야 당신이 머릿속에 떠오른건지.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워 교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천천히 익숙한 당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르게 집에 들어가면, 마음이 포근해지는 그런 곳으로.

 

  그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즈음, 당신은 살짝 열린 베란다 문으로 두 팔을 난간에 걸치고 고개를 내민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며 기다란 검지와 중지에 담배 하나를 들고 입에 무는 모습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같이 기분이 묘해서 나도 모르게 몇 분 동안이나 당신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두 손으로 책가방의 끈을 꽉 쥐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초인종을 누른 뒤 당신이 문을 열고 나왔을때 는,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키가 큰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한참이나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날 내려다 보다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너무나도 다정하게 자고 갈려고? 라는 말을 건넸다. 나는 한참이나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초졸 하게 계란후라이와 몇 개의 반찬으로 저녁을 때우고, 나는 건네받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소파에 앉아 깎아놓은 사과를 하나 집어먹고 있는 당신의 옆에 털썩 앉았다. 사각거리는 과일의 소리를 들으며 아무 말 없이 틀어져 있는 티비를 응시했다. 그러다 용기를 내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어왔다.

 

 

"...형,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괜찮아."

 

 

  항상 나를 향해 지어주었던 웃음을 머금은 당신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면서,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사과를 손에 쥐어 한입 베어 물고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당신은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베란다 좀 나갔다 올게."

 

 

  추우니까 안에 있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담뱃갑을 챙겨 나가는 당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전처럼 난간에 팔을 기대고,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인다. 소파에 놓여있는 쿠션을 끌어당겨 안았다. 머리에 가려진 뒷목과, 탄탄한 등을 지나 길쭉한 다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또다시 넋을 놓고 멍하니 당신을 바라보다가, 뭐하는 짓인가 싶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는 소파 밑으로 발을 디뎌 내려와 베란다로 걸음을 옮겨갔다.

 

 

  "그거 맛있어요?"

 

 

  베란다 문을 열고 오소소한 기운에 팔을 쓸어내리며 당신의 옆에 몸을 멈췄다. 입에 담배를 물고 있던 당신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대답을 해왔다.

 

 

  "맛있기는."

 

 

  나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연기를 뱉는 모습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어서, 숨을 죽이고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들어가, 너 건강에 안 좋아."

  "괜찮아요."

 

 

  시선을 힐끔 내린 당신이 건네오는 다정한 말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무슨 맛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형, 나도 한번만요."

  "뭐를?"

  "이거요."

 

 

  까치발을 들어 당신의 손에 들린 담뱃갑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역시나 순발력은 당신이 더 빨랐다. 쓰흡, 나름대로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날 혼내려는 것 같은데, 역시나 무리.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는 아이마냥 칭얼거리며 아무것도 모르는 마음으로 한 개만 달라며 졸라댔다. 철이 덜 든 아이처럼, 마치 사탕 하나 달라는 듯이 졸라대며. 당신은 순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끝이 타들어 가는 담배를 다시 입에 물다가, 길쭉한 두 손가락으로 남은 담배를 뺀 뒤에-.

 

 

  "......"

 

 

  말캉한 무언가가 내 입술에 닿았다. 경직되어있는 내 어깨를 감싸 안고, 톡톡 혀끝으로 건드리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꾹 다물어진 입술을 열어주고 말았다. 순식간에 밀려 들어오는 혼미한 담배 맛에 나는 어지러움이 온몸을 지배했다. 시선을 어디다 두지 결정하지 못한 채, 나는 그저 멍하니 입을 맞춰오는 행동에 장단 아닌 장단을 맞춰주고 있는 것 같았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볼을 감싸 안고, 부드럽게 쓸어내리기도 하며 내 정신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인지 당신은 나의 허리께를 붙잡으며 조금 더 몸을 밀착해왔다. 내 작은 몸을 감싸 안으며,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아래로 떨어뜨렸는지 모른 채. 씁쓰름한 담배 냄새가 입안 멀리 퍼졌다. 당신을 닮은 냄새가, 내 온몸을 감싸 안아왔다.

 

 

  "....형아..."

 

 

  당신은 무언가에 잔뜩 취한 듯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집 안으로 걸음을 천천히 옮기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당신의 행동을 따라 하게 되서, 허리춤을 붙잡은 당신 때문인지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당신의 입맞춤에 두 팔을 목에 두르며 더욱 응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 채 그저 두 눈을 감고 현실을 거부하는 것 같으면서도, 따뜻한 체온이 너무나 가슴을 뛰게 해서.

 

 

  "하아, 형...현오형, 아-,"

 

 

  어느새 발뒤꿈치에 딱딱한 소파의 다리가 닿고, 당신은 내 목덜미에 여전히 입술을 파묻은 채 부드럽게 나를 소파에 눕혀왔다. 긴장하고 있는 내 어깨를 이어서 팔꿈치까지 쓸어내려 주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 그저 당신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항상 은연중에 만져보고 싶었던 당신의 탄탄한 등허리도 손을 펴서 더듬어보기도 하고, 부드러운 머리켤을 만지작거려보기도 하고. 내 귓가에 뜨거운 숨을 뱉으며 당신은 점점 밑으로 손을 뻗어 갔다.

 

 

  "형, 아니..형-,"

 

 

  순간, 당신의 손길이 너무나도 낯설어졌다. 아니야. 이건 내가 알던 손길이 아니야, 더는 당신 같지가 않다. 두려움에 질린 눈빛으로 팔을 뻗어 당신을 밀어냈다. 연신 낯선 손끝으로 내 몸을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나도 불쾌해졌다. 몸이 경직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머리끝까지 차고 올라와서 애타게 당신을 불러왔다.

 

 

  "하지 마요,"

 

 

  기어코 눈물이 터졌다.

 

 

  "하지 마, 이건, 아빠나 하는 짓이잖아...제발 하지 마요..."

 

 

  순간 당신이 모든 행동을 멈췄다. 작은 거실에서는 조용한 나의 울음소리만 울러 퍼졌다. 이어서 당신의 한숨 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나는 서럽게 울었다. 무서워, 무서워. 하지마.

 

 

  "...미안해."

 

 

  몇 분이나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당신은, 나의 옷을 추스려 주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굳어 있는 나의 허리를 붙잡아 올려 울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내 볼을 감싸 안더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품에 안아왔다.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다시 익숙하게 돌아온 당신의 품 안에서 멈추지 않는 눈물을 떨구는 일 밖에는. 

 

 

  "언제부터 아빠가 그랬어?"

 

 

  당신은 눈물 날 정도로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적으로 어릴 적 시절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구석에 웅크려 앉아 있는 한 아이에게 다가오는 남자가, 그 이후로... 나는 눈을 꾹 감았다. 항상 이어지는 일상들이었다. 엄마가 간식을 건네주고,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아빠에게 정신없이 설명할 수 없는 몹쓸 짓을 당하고. 기억이 잘 안 나요...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신은 과연 내 마지막 말을 들었으려나.

 

 

  "...가람아,"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나답게 행동할 수 있는 건 당신 앞에서만이라는 것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눈물을 안으로 머금으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죽어버려. 연신 마음속 깊이 묻혀있던 분노와 고통이 섞여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앞에서, 나는 아이마냥 소리 내어 잔뜩 울었다. 그리고 상냥한 당신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나를 따스한 체온으로 안아줄 뿐이었다.

 

 

 

 

 

  며칠간 나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당신의 집에 머물렀다. 사실상 계속 당신의 향기가 묻어나오는 침대에서 온종일 잠만 잤다는 게 진짜이지만 말이다. 며칠을 그렇게 꼬박 잠이 들었을까, 밖은 어둑해져서 눈을 떴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 빈 천장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눈을 여러 번 깜박이며, 손을 뻗어 눈을 비벼왔다. 침묵을 유지하는 집 안에는 오직 나만 존재하는 듯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눈빛으로 기다랗게 만들어진 침대의 그림자를 쫓았다. 기분이 몽롱했다. 과거의 모든 기억들이 완벽하게 사라진 듯했다. 

 

  나는 침대 밑으로 발을 디디고 내려와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통에 담겨있는 유리컵에 물을 따라 몇 모금 목을 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왠지 모든 일이 원위치가 된 묘한 기분이었다. 순간 이렇게 며칠간 잠이 들기 전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팍, 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우습게도 저번에 느꼈던 반대의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오래 흐른 것도 아닌데, 참 웃기지. 자꾸만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이마 뒤로 편하게 넘겨버렸다.

 

  왠지 오늘이 아니면 안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정말 '청가람'으로 지낼 수 있는 당신 앞에서, 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남은 삶을 살아가면서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잠을 자면서 꿈을 꾸면서도, 조금 더 발을 디디고 올라선 나의 모습은 단 한 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훌훌 털어버리고 모든 것을 잊고 싶어도 자꾸만 어릴 적의 끔찍한 기억들이 내 발목을 잡았다. 벽을 무너뜨리려 하고 부셔 버리려 해도 결코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는 모습에 나는 넘어설 기회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결심을 해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당신은 일이 끝났는지 몸을 추스르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거실에 불도 켜지 않은 채 티비를 보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이제야 일어났냐며 다정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몸은 괜찮아? 밥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나를 대하는 태도에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껴안았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며 고르고 있는 사이, 금세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온 당신은 내 옆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왔다. 한참이나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말이 없었다. 당신은 나름대로 저번의 일을 신경 쓰고 있는 듯 보였다. 답지 않은 당신의 모습이 괜스레 귀여워서 보이지 않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형,"

 

 

  당신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생각보다 실행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뭐라고 대답해올까, 지그시 흔들리는 목울대를 가다듬고 나는 꿈에서부터 생각해왔던 그 말을 천천히 흘려보냈다.

 

 

  "나랑 다시 한번, 한 번만... 자주면 안돼요?"

 

 

  뒤끝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말에 당신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한 채 연신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당신을 올려다보며, 소파에 앉아있는 당신의 허벅지 위로 몸을 옮겨왔다. 당신은 연신 내 몸을 밀어냈다. 하지만 나는 결심한 듯 길게 뻗은 소파 위로 당신의 몸을 밀어 내려뜨리고, 누워있는 당신의 위에 다시 올라탔다. 탄탄한 배 위에 몸을 얹고 당황한 당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으로 달빛이 얼굴 위로 비쳐왔다. 눈이 부실 정도로 멋있어서, 나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다시 한 번 당신의 거친 입술에 살짝 입맞춤을 해왔다. 두 팔을 당신의 얼굴 사이에 두고 몸을 지탱한 채, 나는 저번에 당신이 해준 것처럼 혀를 가뿐히 밀어 넣었다. 저번에 했을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뜨거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가쁜 숨을 내쉬며 당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벌려진 안쪽 허벅지 사이로 잔뜩 부풀어 오른 무언가가 노골적으로 느껴져서, 나는 작은 소리를 뱉었다. 한참이나 입을 맞추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떨어진 입술 사이로 기다란 은빛의 타액이 주욱 늘어나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신과 시선이 마주쳤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엉망이 돼버린 내 얼굴을 바라보던 당신은, 기어코 입을 열어왔다.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니...."

 

 

  나는 두 눈꼬리에 눈물이 아닌 무언가가 잔뜩 맺힌 채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내가 제자리걸음만 할 것 같아서. 틀에 갇힌 나를 밖으로 도망치게 하고 싶어서, 나는 당신의 부드러운 손을 붙잡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당신은 손을 뻗어 아득하게도 내 볼을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그래. 당신은 대답했다. 그래. 다시 한 번더. 

 

  그리고 그다음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나는,

 

 

  "...형,형...흐으...형아..."

 

 

  나와 함께 된 몸을 끌어안아 주는 당신의 손길에 중독되어 탄성을 내질렀다. 당신은 땀에 젖은 앞머리도 눈물 날 정도로 다정하게 쓸어주고, 처음 느껴보는 흥분에 어쩔 줄 몰라 제대로 가눌지 못하는 아이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다시 한 번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고,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대고는 시선을 또다시 마주했다.

 

 

  "가람아."

  "흐으..."

 

 

  행복해. 이제 여기서 콱 죽어버려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나는 연신 울부짖으며 당신을 끌어당겼다. 움직이는 몸짓에 나는 당신의 허리에 두 다리를 감아오며 더욱 당신을 재촉했다.

 

 

  "예뻐, 가람아. ...누구보다도 예쁘다."

 

 

  당신은 나의 갈색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으며 귓가에 녹아버릴 것 같은 말들을 속삭였다.

 

 

  "아, 아...형아, 현오형...흐으..."

 

 

  우습게도 이날은, 수없이 많은 관계를 가져왔지만 내 생에 처음으로 함께 있으면 마음이 뛰는 사람과 함께 '오르가즘'이라는 것을 느낀 첫날이었다.

 

 

 

 

 

  그리고 나중의 일을 얘기해보자면, 딱히 당신은 나와 몸을 섞어놓고도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저 예전처럼 평범한 형 동생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내가 당신에게 진심으로 무용을 전공하고 싶다고 넌지시 말을 건넨 것뿐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이 시간부터 선생님이란 호칭을 제안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의 말에 승낙했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은 일상이었다.

 

  하루는 당신에게로부터 받은 검은 색 무용복을 입고 레슨이 끝난 후 연습실 바닥에 벌러덩 누워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니 음악이 나오는 카세트를 만지고 있는 당신이 시야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당신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선생님, 하고 당신을 불러왔다.

 

 

  "응?"

 

 

  고개를 돌려오며 당신은 나를 언제나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봐주었다.

 

 

  "좋아해요."

 

 

  나는 두 눈을 깜박였다. 당신은 나의 말을 듣고 가만히 행동을 멈추더니, 다시 시선을 카세트로 돌렸다. 나 역시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옆으로 넘기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순간,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나도 가람이 좋아해."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나는 누워있던 탓에 살짝 먼지가 묻은 팔꿈치 부분을 털어냈다. 당신과 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괜찮아. 후, 불었던 먼지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처음보다 무용도 꽤 많이 늘고, 나와는 별 상관이 없지만 벌써 입시를 준비하는 3학년에 들어섰다. 그리고 당신과 몸을 섞은 후에 나는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집 같지도 않은 집에서 도망을 나오고, 당신이 구해준 작은 월세방에 몸을 옮겼다. 이제 맘 편안하게 생활해도 되. 다정함을 잃지 않은 당신의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나는 새로운 시작에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나도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 무용 연습도 더 열심히 하고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훌훌 털어버리자고 자신에게 약속했던 시절들. 하지만 행복이 찾아오면 불행이 온다더니, 우습게도 나에게는 연속으로 불행만 주구장창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웃기게도 그날도 역시나 레슨이 끝나고 혼자 살게 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큰 번화가가 있어 밤마다 취한 취객들이 몰려다니는 그런 곳을 어김없이 지나치는데, 누군가가 내 이름을 익숙하게 불러왔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어 무시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옮겼다. 하지만 또 누군가가 다시 한번 더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을 때는,

 

 

  "우리 가람이 아니야~ 잘 지냈어?"

 

 

  자주 아빠와 함께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던 이름 모를 아저씨가 코가 잔뜩 빨개진 채 날 바라보며 서 있었다. 순간 온몸이 경직되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잊고 싶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끔찍한 기억들이 다시 한 번 온몸을 상기시켜주는 듯했다. 이제서야 괜찮아졌는데, 괜찮아졌는데... 혀가 잔뜩 꼬인 채로 나에게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 때문에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뭐 하고 지냈니? 응?"

 

 

  순간적으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스물스물 머리끝까지 채워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괜찮아졌는데, 난 이제 괜찮아... 했던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져서 어지러워져만 갔다.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으며, 점점 나에게로 다가오는 남자를 피해 천천히 걸음을 뒤로 옮겨갔다. 그리고는 결국 발끝에 걸린 무언가에 뒤로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내 위로 점점 어두운 그림자가 나를 감싸 안았다. 두려움에 증폭된 정신이 모든 신경들을 조종하여 몸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가, 너는 정말 타고났어.'

 

 

  귀를 막았다.

 

 

  '어쩜 이렇게 예쁜 짓만 할까. 아저씨가 이거 줄 테니까 얼굴 좀 들어볼래?'

 

 

  귓가를 맴도는 환청들에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이제서야 괜찮아졌는데... 웃기게도 모든 것이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나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에 몸을 일으켜 도망쳐야 된다는 생각이 드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저주스러운 몸뚱아리였다. 그리고 남자는,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려왔다. 아아, 이제 끝이야... 누군가 후두를 끊어버린 듯 컥컥거리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거칠게 올려 들려진 탓에 신발 한 짝이 힘없이 벗겨졌다. 

 

  "우리 아가, 아저씨랑 재밌는 거 하러 가자,"

 

  내가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텅 빈 두 눈으로 그저 멀어져가는 짝을 잃은 신발 하나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모든 게 끝나버린 모텔 방 안에서는 비릿한 정액냄새에 가득 차 구역질을 유발했다. 헛구역질을 헤대며 다리 사이로 엉망으로 흐르는 무언가를 거칠게 이불로 닦아버리고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꽃병을 집어 저 멀리 세게 던져버렸다. 쨍그랑, 꽃병이 깨져 사방으로 흩어지는 유리조각이 손에 집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리에 몸을 엎드렸다. 몸에 스치는 유리조각들에도 아무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러워. 더러워, 죽어버려, 죽어버려!'

 

 

  갈색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한 움큼 쥐어 잡았다. 바닥에 엎드려서 그저 계속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바닥은 이미 투명한 무언가로 흠뻑 젖어 마를 생각을 일절 하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걸어나가려 해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구나. 절망과, 분노와, 증오가 또다시 뒤섞여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졌다. 난 뭘 해도 안될 운명인가 봐. 갈색의 머리카락에 가려진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이 너무나도 익숙해서 부서질 것 같은 몸을 바닥에 기대었다. 다리를 뻗고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다가, 두 눈을 꾹 감아왔다.

 

  그때부터였다. 정신을 놓고 마구잡이로 여러 사람과 몸을 섞기 시작한 건. 그때만큼은 '청가람'이 아니기를 자신에게 세뇌시키면서, 항상 짧게 머리를 치던 나는 머리를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기르기 시작하고, 엄마가 매번 하던 짙은 화장을 나에게 덧입혔다. 나는 나에게 마치 벌을 주는 듯 항상 아빠 뻘의 사람들과 섹스를 하고, 돈을 받았다. 섹스할 때는 혼이 나간 듯 그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따라 하고, 끝난 뒤 돈을 주고 그 사람들이 방을 나가버리면 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와서 마구잡이로 물건을 던지며 미친 사람마냥 흐느끼곤 했다. 스스로 고문하는 듯 내가 아닌 정신이 나를 지배하는 것만 같았다. 최고로 맛있는 년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정말 창문을 열고 몸을 던져버릴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세상을 굳이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 그때만큼은 무용도, 현오도, 그 무엇도 나를 '나'로 되돌릴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변질되어서, 더럽혀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습게도 주은찬이라는 아이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때는 반쯤 미쳐서, 무슨 생각으로 학교에 갔는지도 모르는 시절이었지만. 입시가 시작될 3학년일 때 너는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다. 전학을 온 이유는 아무도 자세히 몰랐지만, 전 학교에서 무슨 사고를 쳐서 겨우 전학을 온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누가 오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지만 주은찬은 아니었다. 그 아이는 매사에 시큰둥해 보이는 듯 보여도, 은근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다 꿰뚫고 있었다. 나에게 시비터는 귀찮은 아이들에게 주먹질을 할 때면 꼭 옆에 주은찬이 서서 구경하고 있었고, 수업시간에 볼펜을 물고 꾸벅꾸벅 졸다가 문득 잠이 깨서 고개를 돌리면 그 아이는 항상 나를 향해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묘한 사람이었다. 가끔가다 눈이 마주치면, 너는 그 순진한 얼굴로 작게 웃음을 지어왔다. 익숙하지 않았다. 도대체 넌 뭐니. 주은찬은, 인정하기 싫지만 어느새 현오 다음으로 관심이 가는 인물 중 한 명이 돼버린 것이었다. 

 

  또한 옥상에서 주은찬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나는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몸 섞는걸 그만두라고? 그러면 난 어떻게 살아가지? 내 죄의식은 어떡하라고? 나는 차마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서 가늠할 수 가 없어졌다. 머릿속이 실타래가 꼬인 듯 무척이나 복잡해졌다. 그 망할 붉은 머리색이 눈앞에서 연신 이글거렸다.

 

 

  '그리고 그만둬. 왜 도대체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주은찬이 나에게 건넨 말이 불현듯 머릿속에 지나갔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이불을 끌어안으며, 눈을 반쯤 감고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게, 왜일까..."

 

 

  나조차도 내릴 수 없는 결론을 너가 내줄 수 있겠니.

 

 

 

 

 

  그리고 결론은 나왔다. 나는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딱히 너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기회로 너란 아이를 내 기억 속에서 지워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는 나와 어울리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혹시라도 내가 너를 물들일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에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항상 뒤로 짧게 묶고 다녔던 익숙지 않은 머리는 이 기회로 확 잘라버렸다. 항상 뜯어버리고 싶었던 갈색 머리도 검게 물들였다. 그리고 한동안 찾아가지 않았던 학원도 이제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현오는 몇 개월간 연락이 끊겼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온 나를 보자마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어서 평소같이 나를 학원 안으로 맞이해주었다. 그리고 어디다 뒀는지 기억도 안 나는 내 무용복을, 락커에 내버려져 있던 걸 가지고 있었다며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싶고, 아무것도 묻지 않은 현오에게 너무나도 고마워서 쥐구멍으로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그렇게 나는 학교를 그만뒀다. 무용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방황할 때도 학교를 나가지 않았던 탓에 이미 퇴학처리가 되어있을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하지만 속은 후련했지만, 연신 마음에 걸리는 한 사람이 있어서 문제였다. 내가 눈앞에 밟힌다는 말을 건넨 너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이제 나와 끝난 사람이라고, 더이상 얽힐 일도, 만날 일도 없다고 생각해봐도 너의 그 또렷한 두 눈동자가 내 마음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하루는, 레슨이 끝난 후 현오와 함께 오래간만에 저녁을 먹으러 학원을 나서는 길이었다. 미리 나온 반찬들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는데, 오늘따라 뭔가 이상한 현오가 나에게 어김없이 말을 걸어왔다.

 

 

  "가람아, 너 혹시 누구랑 사귄 적 있지 않니?"

 

 

  나는 순간 사레가 들려서 물이 담긴 컵을 입에 쏟아부었다. 켁켁거리며 무슨 소리냐며 현오에게 말을 건네는데, 꽤나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아직까지 목이 아파서 물을 한 모금 더 마시다가, 힐끔 현오의 시선을 살폈다.

 

 

  "없어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부정했다. 정말? 다시한번 물어보는 현오에게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사귀지 않은건, ...맞는 사실인걸. 불현듯 너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갔지만, 헛웃음이 터져 나와서 생각을 지워버렸다. 앞으로도 없을 일일뿐더러 있으면 안되는 일이니까.

 

 

  "돌아가면 안 되는 거야?"

 

 

  또다시 현오는 나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잠시 컵에 물을 따르다가, 벌써 나온 순두부찌개에서 올라오는 김 때문에 고개를 들었다.

 

 

  "그럴 거 같은데요."

 

 

  애매모호하게 대답을 한 나를 여전히 현오는 바라보았다.

 

 

  "나랑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서, 붙잡을 수가 없어요. 그런 낯간지러운 건 나랑 안 어울리기도 하고."

 

 

  씁쓸하게 웃음을 지어보았다. 나는 너에게 알맞은 사람이 아닌걸. 그리고 현오는 물끄러미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왜요, 또 물어볼 거 있어요? 나는 조금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돌아가는 게 어때?"

 

 

  그리고 손을 뻗어, 예전으로 돌아간 것 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익숙한 손길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서 멍하니 현오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제가 어떻게 돌아가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현오에게 대답을 했다. 파렴치한 내가, 어떻게.

 

 

  "여기."

 

 

  현오는 내 손에 자그맣게 몇 번 접혀있는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나는 물끄러미 작은 내용물을 바라보다가, 현오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열어보라는 손짓에 나는 조심스럽게 쪽지를 펴기 시작했다. 내가 쓴 거긴 하지만, 직접 받은 거야. 쪽지에는 처음 보는 주소와 전화번호,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 세 글자가.

 

 

  "그 애, 너한테 말도 못 걸고 학원 앞에서 서성거렸던 거 알아?"

 

 

  알아요. 사실 다 알고 있었다고. 너가 계속 내 주변에서 맴돌았던 것 모두다 알고 있었다고. 나는 물끄러미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애꿎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바보 같기는. 내가 아는 척이라도 해줄까 봐.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눈앞에 아른거리는 너에게 조금 애정이 섞인 농담을 던졌다.

 

 

  "가람아,"

 

 

  다시 한 번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돌아가."

 

 

  두 번 다시 책망하지 말고. 마음이 찌르르, 울려왔다. 어슴푸레한 너의 형상이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현오는 아무 표정없이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나를 보며 슬몃 웃어왔다. 너가 문득 보고 싶어졌다. 너가 나를 향해 던졌던 말들과, 지어줬던 미소와, 올곧은 눈빛이 눈앞에서 자꾸만 아른거려서. 너와 제대로 알고 지낸 기간은 몇 개월조차 되지 않는데, 이렇게까지 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해버리다니 사람 마음 참 웃기지.

 

 

  "선생님,"

 

 

  의자에서 앉아있던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현오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슬며시 끄덕여왔다. 고마워요. 인사를 건네고는, 발걸음을 천천히 나섰다. 내일 보자. 포근함이 가득 담겨있는 현오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주머니에 소중히 들어있는 쪽지의 주소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은찬 너가, 나의 집을 찾아올 때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사실 나는 너와 그런 곳에서 그런 차림으로 너를 만나는 것은 정말이지 꿈에서도 상상 못할 일이었는데, 너도 과연 나를 보면 놀랄까. 아니면 이미 예상하고 있을까.

 

  점점 걸어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져서, 나는 조금 속도를 내어 뛰기 시작했다. 벌써 어둑어둑해졌잖아. 가쁜 숨을 내쉬며, 하얀 입김이 몽실거리며 올라가는 하늘을 문득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낮춰 멀리 있는 작은 주택을 바라보았다. 괜스레 카키색 야상을 입은 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과연 올바른 선택일지 미래에 후회할 일일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쪽지에 적혀있는 주소에 도착하고 나서는 우습게도 꽤나 떨리는 마음으로 벨을 눌렀지만, 역시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너가 안에 없는 모양이었다. 혹시 문을 안 잠그지는 않았을까 슬며시 문고리를 잡아 돌렸더니 웃기게도 탈칵하고 손쉽게 열려왔다. 너다운 모습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집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서, 주변을 살폈다. 옷이 널브러져 있는 침대에서 편한 옷가지 두 개를 집어 들고는 조금 추운 것 같아 보일러를 틀고, 욕실로 들어갔다. 옷에서 나는 너의 익숙한 향기에 웃기게도 마음이 무척이나 안심이 됐다. 너를 다시 볼 수 있는 건가. 정말 여기 너란 아이가 존재하고 있다니. 너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나는 명확한 정답을 내렸다. 너가 사용하는 샴푸와 바디샴푸를 쓰고, 너의 향기가 나는 옷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을 때는,  

 

 

  "...이제야 오니?"    

 

 

  멍하니 책가방을 소파에 올려두는 너와 정면으로 마주쳐서, 입을 천천히 열어왔다. 더는 보지 못할 것 같았던 그 얼굴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벅차올라서, 주춤거리며 떨리는 두 손을 몸 뒤에 얼른 숨겨왔다. 그리고 너는, 주은찬 너는.

 

 

  "......."

 

 

  표정을 알 수 없는 너가 나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와 몸이 부스러질 정도로 나를 힘껏 품 안으로 안아왔다. 아아. 너의 불규칙한 숨소리와, 너에게서 나는 익숙한 향기에 나는 너의 품 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너를 갈망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렇게 내가,

 

 

  "청가람, 가람아...가람아..."

 

 

  반가울리가 없잖니...

 






▼현재 dear lady 수량조사 받고 있어요 ^mm^

http://iiiwriting.tistory.com/m/post/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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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Lady

part. 2

(주은찬 x 청가람)

 

 

 

 

  뒤는 굳이 나열하여 줄줄 설명하지 않아도 뻔했다. 나는 엉망진창이 된 집을 대강 정리하고, 너는 흑색의 마스카라와 쉐도우가 뭉쳐 눈 아래까지 잔뜩 번져있는 얼굴을 씻고 오겠다며 작은 욕실 같지도 않은 욕실로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던 참이었다. 내가 무릎을 굽히고 쓰레받기로 바닥을 쓸고 있을 때 고개를 돌리자마자 무엇인지 딱 알수 있을정도로 선명한 허연 액체들이 늘러 붙어 있는 너의 다리와, 그 위로 덮인 짧은 스커트가 눈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시선을 재빨리 다른 곳으로 돌려왔다. 딱히 눈길을 돌려 저 모습을 눈에 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말끔하게 얼굴을 씻고 반소매 하나와 반바지를 걸치고 나온 너는 수건으로 머리의 젖은 물기를 닦은 후에 낡은 화장대 앞에 엉덩이를 털썩 붙이고 앉았다. 서랍에서 길쭉한 검은색 드라이기를 익숙하게 꺼낸 후에 너는 코드를 꽂다 말고 멍하니 거울 안의 너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깊게 일렁이는 두 붉은 눈동자로, 반대편에 비친 너의 얼굴을 꾸준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게 너는 몇 분을 보냈다. 그 사이에 나는 장롱을 뒤지며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이불을 말끔하게 청소한 바닥에 베개와 함께 내려놓았다. 바닥이 꽤나 차가운 것 같아 튼 지 오래 돼 보이는 보일러도 틀었다. 시간이 조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드문드문 차가운 부분이 있어 손을 대보는 나에게 가만히 의자에만 앉아있던 너는, 그제서야 여기 보일러 잘 안돼서 연탄떼야되. 라는 말을 익숙하게 건네왔다. 잠시 눈을 깜박이며 너의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머리를 말리고 의자에서 기어코 내려온 너의 행동에 코를 괜히 문질렀다.

 

  미적지근한 요 위에 우리는 나란히 등을 돌리고 누웠다. 춥지도 않은 듯 반팔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너는 반대편을 등지고 누워있었다. 또다시 생각에 잠겨 차가운 벽의 모서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너의 쪽으로 몸을 돌려왔다. 너의 작은 두 어깨가 시야에 들어오고, 나도 모르게 추울 것만 같아서 허리께까지만 덮여있는 담요를 손을 뻗어 끌어당겨주었다. 잠시 움찔 움직이는 너의 어깨를 은근슬쩍 손으로 감싸보다가, 다시 손을 제자리로 가만히 내려놓았다.

 

 

  "주은찬,"

 

 

  순간 너의 몸이 내 쪽으로 돌아오는 동시에 너는 너무나도 익숙한 내 이름 세 글자를 불러왔다. 좁은 창문으로 쏟아지는 달빛에 내비치는 너의 얼굴은 정말이지 '청가람' 너 자체여서 숨이 턱 막혀왔다. 속쌍꺼풀을 지닌 또렷한 두 눈은 너의 눈이었고, 한 번쯤 쓰다듬어보고 싶은 하얀 피부도 너의 피부였으며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맨 입술도 너의 입술이었다. 나도 모르게 생각해버린 마음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너의 물음에 조용히 응, 이라며 조심스럽게 대답을 해왔다.

 

 

  "왜 하필 나야?"

 

 

  너의 깊은 두 눈동자 안에는 나의 얼굴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너는 딱히 화가 나서 물어보는 것 같지도 않았고, 따지듯이 묻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너는 정말 '궁금했던 점'  자체를 묻는 것이었다. 그 속 안에 비친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꿀벙어리가 되어서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그냥."

 

 

  고민하고 고민해서 나온 정답이었다. 할 말은 이것뿐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정말, 그냥."

 

 

  너에게로부터 희미하게 풍기는 담배냄새가 우습게도 기분이 불쾌하지 않아서, 입안으로 타들어 가는 뒷말을 입안에서 연신 삼켜버릴 뿐이었다.

 

 

 

 

  얼마나 잠에 취해있었던 건지, 두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산 중턱에 걸릴 만큼 작은 창문으로는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너는 어제 내가 너의 등에 걸쳐준 점퍼를 입은 채 티비에 시선이 쏠려있었다. 머리에는 까치집을 하나 만들고, 쪼그려 앉아 컵라면을 두 손에 들고 멍하니 시선을 빼앗긴 너였다. 벽에 등을 기대고 정신을 티비속으로 들여보낸 너는, 내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에서 깬듯한 기척을 내자 잠시 시선을 돌리더니 그제야 나에게로 눈을 치켜들며 재빨리 흘겨왔다.

 

 

  "뭐 그렇게 오래 자니?"

 

 

  말끝은 톡톡 쏘는 말투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방금 잠에서 깨어나 비몽사몽 해 정신이 없는 나에게 물컵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마시고 정신 차려, 얼떨결에 한 손으로 물컵을 건네받고, 투명하게 찰랑거리는 맑은 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기다 독 탄 거 아니지? 너, 그냥 죽어. 장난스럽게 말을 꺼낸 나에게 너는 손을 뻗으며 신경질적인 얼굴로 다시 내놓으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나는 너의 반응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조금 익숙하지 않은 사실을 깨닫고 너를 향해 다시 한 번 웃어 보였다. 본의 아니게 이 모습이 너의 앞에서 처음 웃는 모습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불을 끌어당겨 무릎에 덮고 너의 옆에 앉아 티비를 시청하며 마지막 하나 남은 컵라면을 입에 털어 넣었다. 무슨 생각으로 방송을 시청했는지, 이따금 예능에서 웃긴 장면이 나올 때마다 아이처럼 살짝 웃음을 짓는 너를 의식해서 전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사실 티비 대신 너를 시청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능이 끝났을 때 즈음 너는 리모컨으로 티비를 끄고, 텅 빈 컵라면 컵을 쓰레기통을 향해 골인한 후 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뒤에서 물끄러미 너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입을 열고 너를 불러왔다.

 

 

  "가람아,"

 

 

  너는 나의 부름에 상냥하게도 바로 뒤를 돌아 바라봐 주었다. 항상 봐왔던 너의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와서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결코 쌀쌀하지 않은 대답으로 대꾸를 해주는 너에게, 나는 아까부터 달싹이던 입을 열어왔다.

 

 

  "학교는?"

 

 

  너는 두 단어를 듣자마자 지겹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잘못된 질문을 골랐구나, 하며 후회하고 있을 때 즈음 한참이나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너는 기어이 헛웃음을 치며 대답을 해왔다.

 

 

  "다 끝난 거 이제 와서 뭐해."

 

 

  정말이지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얼굴이어서, 나는 차마 너에게 더 이상의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조금 더 쉬운 일이었다. 서로에게 암묵적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조용히 있었던 침묵의 약속을 깨트리고, 나는 너에게 질문을 건네면 너는 잠시 고민하며 답변을 해주었다. 너는 이렇게 나에게 이야기를 조금씩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주제는 어제와 비슷했다. 너무나도 덤덤하게 이야기를 꺼내와서, 나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작아 보이는 너의 어깨를 금방이라도 끌어당길 뻔한 욕구를 애써 삭혀왔다. 나는 조용히 숨을 죽이며, 너가 나에게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는 이야기들을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따금씩 분노에 차올라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속사정을 토해내거나 할 때면, 나는 너를 조용히 다독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너와 나는 닮은 점이 꽤나 많이 있었다. 너의 마음속 안에는 서로 얽히고 얽힌 커다란 성이 가득 메꾸고 있었다. 분노가 끌어 올라서 입 밖으로 꾸역꾸역 되올라오는 것을 너는 애써 막고 있을 뿐이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었다. 우스운 건 너는 딱히 나에게 감성팔이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대로의 사실을 그저 말해주는 것뿐인데도 이렇게 속이 아파졌다. 그저 나는 조용히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즈음 나는 차마 참지 못하고 너를 한번 더 끌어당겨 품에 안아왔다.

 

 

  "힘들었지."

 

 

  너의 귓가에 얼굴을 기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너를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를 만난 지 겨우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란 아이에게 무척이나 깊은 동질감이 들어서 괜스레 마음이 쓰라려 왔다. 너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안겨있을 뿐이었다. 너의 목선을 타고 떨어지는 머릿결에서, 기분 좋은 샴푸냄새가 정신이 빠질 정도로 주변을 맴돌았다.

 

 

 

 

  며칠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얘기해보자면, 너는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을 싸그리 부정해버리는 듯 나로부터 자취를 완전히 감춰버렸다. 너의 존재를 내 기억 속에 지워버리려는 듯한 모습이 나를 꽤나 아프게 했다. 새벽에 잠이 들은 내 몸 위로 담요를 덮어주고, 어젯밤까지만 해도 화장대 위에 나열돼있던 물건들이 재가되어 날아간 듯 완벽하게 사라진 모습을 본 나는 조금 쓴웃음을 지었다. 이 집, 계약 끝났어. 계속 살든 나가든 너 알아서 해.

 

  먼지 하나 없는 서랍을 손으로 쓸어보다가, 문득 어두운 새벽 자고 있는 내 귓가에 속삭이고는 사라져버린 너가 불현듯 떠올랐다.

 

 

  "잘 지내, 안녕."

 

 

  그 위에 곱게 올려져 있던 작은 쪽지 하나 때문에 떠나지 않는 나의 갈증이 더욱 치솟았는지도.

 

 

 

 

  그 뒤로는 놀랍게도 눈 깜짝할 사이에 오랜 시간이 흘렀다. 미련이 남는 마음에 너가 혹시나 돌아오지는 않을까 너의 집에서 며칠 밤을 더 묵었지만, 이 집의 주인인지 심술궂게 생긴 노인이 아침에 문을 따고 들어와 나를 내쫓음으로써 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은 한층 수그러들었다.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집으로 돌아가고도, 나는 너를 찾으러 한참이나 헤매다녔다. 하지만 너는 나와 지독한 숨바꼭질을 하는 듯 서운하게도 내 눈앞에 단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적어도 내 앞가림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학교에 다니다가도, 아이들의 대화에서 간혹 나오는 너의 이름이 들려오면 나는 그때만큼은 귀 기울여 훔쳐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 과장되고 헛된 소문들뿐이었다. 동네 주변에 있는 개천 근처에서 벤치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는 너의 모습을 봤다는 둥, 한 남학생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살했는데 그게 너 라는둥, 중년의 남자 손을 붙들고 모텔촌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꼴렸다는 둥 정말 셀 수 없는 저열한 헛소리들이 너무 많이 들려와서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물론 그중에 루머가 아닌 진실도 섞여 있을 터라도 다른 사람 얘기하기 좋아하는 종족 특성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생각했다. 이 모든 소문의 근원은 너가 무단결석으로 인해 퇴학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떠돌기 시작하면서부터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상에 비스듬히 엎드린 채 그 무리를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그 날도 항상 똑같이 흘러가는 날들 중 하루에 불과했다. 점심시간 매점에서 사 온 메론빵으로 대충 허기를 채우고 책상에 엎드릴 때 즈음, 그 무리는 또다시 너를 주제로 반찬 삼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냐, 우리 어제 청가람 본 거 진짜 맞다니까."

  "걔 아니라고, 병신아."

 

 

  뭘 그렇게 열띠게 토론을 하는지, 이제는 몰래 귀 기울여 듣는 것도 습관이 돼버린 나 자신을 문득 발견했다. 그리고 오늘은 정말이지 뭔가 정말 '소문'이 아닌 '진실'을 말하고 있는듯한 느낌에 나는 한층 더 집중 하기 시작했다.

 

 

  "청가람은 갈색 머린데 어제 걔는 진짜 흑발이었어. 거기다가 머리가 짧았다고."

  "아니, 그거 빼고는 키도 똑같고 얼굴도 똑같았다니까? 걔 살아있는 거 맞아."

  "근데 걔가 무용학원에서 나왔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 새끼야??"

 

 

  나는 엎드려있던 책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인상이 꽤나 험악하게 생긴 남자애가 다른 아이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확신했다. 너가 맞는 것 같아. 기분이 꼭 너가 맞는 것 같아. 나는 의자를 뒤로 빼고 몸을 일으켜 세워 무리로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가 오는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떠들던 무리는 한참이나 그 주체가 너가 아닌지 맞는지에 관한 토론을 계속 이어갈 뿐이었다. 나는 두 눈을 두어 번 깜박이고, 조용히 무리의 어깨에 손을 얹어왔다. 온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고, 당황해 하는 무리에게 나는 서슴없이 질문을 내던졌다.

 

 

  "그 학원 주소, 나도 좀 알 수 있을까?"

 

 

 

 

  딱히 그곳에서 너를 볼 수 있다는 기대를 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무리가 말한 사람이 너였으면 하는 희망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단 하루도 너에 대한 생각을 거른 적이 없었다. 조용한 교실 안에서 책상에 앉아 텅 비어있는 너의 자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너의 몸에서 미세하게 풍기는 쌉싸름한 담배냄새가 코끝을 맴도는 것 같기도 했고, 너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머릿결에서 나는 샴푸냄새가 흐르는 듯도 했다. 

 

  방과 후, 나는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무리가 말해준 학원의 위치로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혹시 너가 아니면 어떡하지? 네가 맞더라도 싫어하지는 않을까, 또다시 나로부터 도망가버리지는 않을까. 나 혼자서 설레발을 치며 앞서 나가는 것 같아서 스스로 자책하기도 하고, 또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너를 내 눈앞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모든 것이 모순덩어리라고 생각했다.

 

  무리에게 건네 들은 주소의 건물은 꽤나 낡은 건물이었다. 건물 벽에 간판이 달린 것을 보고 난 후에 안으로 들어가자 고장 난 엘레베이터와 계단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잠시 답지 않게 머뭇거리다가,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걸어 올라갈 때마다 울리는 운동화의 터벅터벅 거리는 소리가 웃기게도 무척 낯설게 들려왔다.

 

  기어이 문 앞에 다다라서는, 애꿎은 문 손잡이를 연신 잡고 쥐었다 폈다를 몇 어번 반복했다. 안에서 흘러들어오는 노랫소리에 나는 문을 천천히 열고 틈새로 시선을 던졌다. 안에는 끝의 창문으로부터 햇빛이 들어오는 긴 복도가 늘어져 있었고, 가장자리로 몇 개의 방들이 있는 걸 보아 아마 연습실인듯싶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차가운 복도의 기운이 발끝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살펴보니 몇몇 방은 불이 꺼져 있었고, 오직 복도 왼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방만 창문으로부터 환하게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괜스레 불어오는 추위에 몸이 떨려와서, 교복 마이 주머니로 두 손을 찔러넣었다. 점점 끝에 위치해 있는 방과 가까워질수록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가서 마치 귓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어찌나 긴 복도였는지, 경직된 어깨를 벽에 가만히 기대고 문에 있는 작은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누구니?"

 

 

  처음 들어보는 낯선 목소리의 남자가 내 뒤편에 서 있는 것을 이제서야 눈치채고는 뒤를 돌아 벽을 짚고 뒷걸음질 쳐버렸다. 장발의 검은 머리를 반쯤 질끈 묶고, 거치적거리는 듯 앞머리를 왼쪽으로 넘겨버린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는 나를 꽤나 의미심장한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찾는 사람이 있는 거야?"

 

 

  딱 봐도 나의 또래처럼 보이지 않는 그 남자는, 익숙하게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나는 잠시 이곳에 무슨 목적을 가지고 왔는지 기억도 못한 채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답변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무슨 말을 해올까 웃기게도 꽤나 겁을 먹어서, 그 남자를 지나치며 급하게 걸어왔던 어두운 복도의 입구를 향해 정신없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 나왔다. 

 

 

  "......"

 

 

  그리고 내 두 귀가 틀리지 않았더라면 그 남자는 내가 훔쳐보려 한 방문을 열면서,

 

 

  "가람아, 너 찾는 사람이 있는가 본데."

 

 

  ,라고 말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기 시작했다.

 

 

 

 

  생각외로 너란 존재는 나와 꽤나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허탈했다. 하지만 너가 아주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나 마찬가지여서, 한편으로는 마음 한쪽이 놓이기도 하였다. 당연하게도 너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은 듯 보였다. 아마 내 존재를 이미 잊어버렸을지도. 너와 처음 만난 날로부터 아주 많은 세월이 흘러서, 벌써 우리가 졸업을 맞이하는 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왔으니 말이다.

 

  너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모르는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너의 이름을 들은 후로는, 더이상 그 학원을 다시 찾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간혹 네가 눈앞에 아른거려 보고 싶어지는 날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너가 있는 건물 앞까지 걸어갔다가, 우습게도 항상 뒤돌기 일쑤였다. 어떤 운수 좋은 날은, 저번에 마주친 키 큰 남자와 함께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목선을 타고 떨어지는 긴 머리를 짧게 치고, 흑발로 염색한 너의 소문으로만 듣던 새로운 모습은 나로부터 시선을 떨어뜨리지 못하게 만들곤 했다. 또한 웃기게도 애써 외면하려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했던 그 남자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너의 모습에 괜스레 안심이 되었다. 아마 너가 이 사실을 알면 마음껏 비웃어주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생각보다 겁이 꽤 많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 같았다. 한 발짝 앞서면 어떻게든 결말을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서 연신 맴돌 뿐이었다. 과거의 당돌함은 어디로 증발해버렸는지 놀라울 만큼 나는 나아갈 수 없는 벽 안에 갇혀있었다. 그렇게 나는 너를 멀리서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나 확실한 건 너가 더이상 내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르는 중년의 손을 붙잡고 걸어간다든가, 어울리지 않는 짧은 치마를 입고 짙은 화장을 한다든가. 그래서 마음이 놓였다. 그 남자라면, 너를

올바른 길을 안내해줄 수 있겠지, 하고.

 

 

 

 

  그리고 그날은, 우습게도 다른 날과 같이 아주 평범한 날이여서 더 잔잔히 흘러갔던 것 같다. 벌써 계절은 한겨울에 접어들어 조금만 밖에 있어도 손이 꽁꽁 얼어버리는 추위가 주변을 감싸 안았다. 관심은 없었지만 나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싹 집중해 공부한 탓에 수능 성적은 그럭저럭 괜찮게 받았고, 담임 말로 표현하자면 '내가 가지 못할 대학'중 하나에 운 좋게 합격하여 입학하게 되었다. 새삼스럽게도 이 모든 사건의 사이에 너가 없다는 사실이 꽤나 이제는 무덤덤하게 느껴졌다. 여름에 예고 없이 찾아온 태풍과도 같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미련한 건 내가 겨울에도 어김없이 태풍이 불어오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나 추운 겨울이었는지 온 동네에 함박눈이 보실보실 쌓였다. 어김없이 너가 있는 건물 앞에까지 걸음을 옮긴 나는, 고개를 들어 굳게 닫혀있는 학원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신 햇살 때문에 손을 눈 위에 얹고 뿌옇게 하늘로 새어 나가는 입김을 의식하며 멍하니 시선을 던졌지만, 시간이 지나도 열리지 않는 창문이었다.

 

 

  "여기 오지 않은 날은 없는 거야?"

 

 

  순간 뒤에서 내 어깨를 톡톡 치며 말을 걸어오는 누군가의 손짓에 깜짝 놀라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너가 아닐까라는 생각에 벅찬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애석한건지 당연한건지 내 뒤에 서 있던 사람은 너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그 남자였다.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저번과도 같이 장발의 머리를 반쯤 묶은 모습에 나는 잠시 말을 잃고 그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 맞지? 저번에 연습실 앞에서 도망친 애."

  "......"

  "가람이 애인?"

 

 

  스스럼없이 말을 뱉는 남자에게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저 멍청하게도 여전히 옴짝달싹하기만 했다. 남자는 말 없는 나를 내려다보다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말로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는 하는데, 은근 툭툭 내뱉는 말 들어보면 너희 평범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

  "맞지?"

 

 

  남자는 추운 듯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휴대폰을 꺼내 잠금을 풀더니, 손을 뻗어 나에게로 건네왔다. 나는 멍하니 그것으로 시선을 쫓았다.

 

 

  "번호랑 주소 좀 적어달라고."

  "...왜요?"

  "그냥."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 얼떨결에 휴대폰을 건네받아 자판을 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가방을 다시 한 번 끌어당기고, 나는 저장까지 완료한 후에 다시 넘겨주었다. 남자는 여유롭게 휴대폰을 받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난 현오야."

 

 

  이거 자기소개라도 해야 되는 건가. 어떻게 이 상황이 벌어졌는지도 이해가 가질 않지만, 어쨌든 나 역시 통성명은 해야 될 듯 싶어 남자에게로 시선을 다시금 던졌다. 

 

 

  "전 주은찬이요."

 

 

  뭐가 그렇게 여유로운지, 남자는 한 번 더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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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였을까, 너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가느른 두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어진 건. 몇 개월 전부터 항상 짧게 친 흑발 머리를 고집하며 뒷목에 제비초리를 드러내고 다니던 너는, 무슨 늦바람이 든건지 새하얀 피부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게 애쉬빛을 띄는 염색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났었다. 어때? 머쓱한 표정으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이 무척이나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너는, 염색을 한 지 며칠째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어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너의 고등학교 시절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새로운 머리가 너무나도 마음에 쏙 들었던 것 같다. 너가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내가 기억 속에서 잊어버린 그 이유 때문인지 바보같이 눈치도 못 채고.

 

 

  "예뻐,"

 

 

   뒷목을 아찔하게 스치는 머릿결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잠이 들어버린 너의 귓가에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이 볼품없이 작은 중고의 침대에서 뭐가 그리 좋다고 내 무릎을 베고는 이렇게 예쁜 모습으로 새근새근 꿈나라로 가버린건지. 반소매를 입은 너가 조금 추울 것 같아 배까지만 덮여있는 보라색 두터운 담요를 끌어당겨 마른 어깨까지 감싸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너가 잠결에 뒤척이다가 목 주위가 다 늘어난 티셔츠 사이로 붉게 물들여진 정체 모를 자국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든 신경이 한쪽으로 쏠린 나는 행동을 멈추고, 조금 좌절한다.

 

 

  "...가람아,"

 

 

  너의 이름을 입에 머금고 지그시 불러본다.

 

 

  "대체 왜..."

 

 

  퀘퀘한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미세하게 찌르는 이 좁은 원룸 안에서는, 쉴 틈도 없이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만 방 안을 가로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Dear Lady

part. 1

(주은찬 x 청가람)

 

 

 

 

 

  너란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의 시간으로 올라가 기억을 더듬어보면, 청가람 너는 참으로 평범하게 어울리기 썩 좋은 친구는 아니었다. 그다지 입에 올릴 만큼 좋지 않은 일을 겪고 나서 부랴부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고, 여기서는 제발 좀 조용히 있으라는 엄마의 간곡한 부탁에 마지못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가 고등학교 3학년, 살인적인 입시에 한창 이리저리 치일 시기였던 것 같다. 물론 나는 그런 것에 관심 하나 없어서 딱히 큰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교실에서도 4분단 맨 뒷자리에 배치를 받아서, 그렇게 아이들에게나 선생들에게 눈을 띄지 않았다. 처음 전학 올 때 교탁 앞에 서서 대충 인사 한번 건넨 후로부터 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었기도 하다. 수업시간에도 항상 엎드려서 잠을 자고, 쉬는 시간에도 항상 어디 론가로 사라져버리는 내가 반 아이들은 참 이상했을 것이다. 나 자신은 내가 봐도 꽤나 정상으로는 보이지 않으니까.

 

  너는, 1분단 바람이 아주 잘 드나드는 창문 옆의 맨 뒷자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것도 원래 그 자리였던 반 아이에게 자리를 바꿔 달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해서 바꾼 것이었지. 조그만 체격으로 얼마나 앙칼지게 굴던지, 성격 사나운 고양이마냥 마치 금방이라도 할퀼 기세로 소리 지르는 너의 모습이 내 눈에는 참 새롭게 보였었다. 그래서 왠지 모르지만 유일하게 반에서 너의 이름은 머릿속에 저장해두고 있었다. 청가람. 키는 쬐끄만하고 기집애같이 생긴 게 성격은 더러운 고양이, 라고. 그리고 항상 너는 무슨 일을 계속 터트렸다. 너의 성격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옆 반 불량학생들이 딱 봐도 만만해 보이는 너를 찾아와 시비를 걸면, 그것을 참지 못하고 자신보다 덩치가 몇 배는 더 큰 그 녀석들을 딱 죽기 전까지 신나게 패곤 했다. 쬐끔한게 힘만 더럽게 쎄서는. 너가 얼굴을 잔뜩 붉히며 그 녀석들에게 주먹질을 할 때, 나는 항상 팔짱을 끼고 그 광경을 구경하곤 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불구경이랑 싸움질이라고, 거기다가 이런 체격도 작은 애가 압승하는 경우는 극히 드무니까 말이다.

 

  그리고 너와 처음으로 주고받은 대화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점심시간에 밥맛도 없고 교실에 무리로 모여 재잘거리는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너무 머리를 울리게 해서 바람이라도 쐴 겸 옥상을 올라간 날, 새삼스럽게도 나는 난간에 기대어 입술 사이로 담배를 하나 물고 있는 너를 발견했다. 당당한건지 간댕이가 부은건지 세상 물정 다 겪어본듯한 짙은 두 눈을 반쯤 감고 너는 저 멀리 검은 매연을 내뿜고 있는 공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 동네가 워낙 구려서 주변에는 공장만 있고 나무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터라 나는 순식간에 이유는 모르겠지만 꽤나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한참이나 그 작은 검지와 중지로 담배 하나를 들며 뿌연 담배 연기를 내뿜던 너가, 내 기척에 금방 눈치를 채고 고개를 돌려왔다. 순간 너의 붉은 두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예상대로 전혀 놀라지 않는 너를 제자리에 서서 바라보다가, 입을 열며 내뱉는 너의 말에 정말이지 청가람다워서 피식 웃고 말았다.

 

 

  '...뭐야, 너?'

 

 

  절대로 너가 웃겨서 웃은 건 아니었는데, 괜히 기분이 나빠졌는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담배꽁초를 옥상 바닥에 버려 삼선 슬리퍼를 신은 발로 비벼 끄기 시작했다. 잔뜩 찌푸린 너의 얼굴을 그제서야 제대로 마주했다. 앙칼져 보이지만, 참으로 평범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눈을 두어 번 깜박이면 너의 짙은 속쌍꺼풀이 함께 따라왔다. 괜스레 너가 낯설어져서,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재빨리 돌렸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너의 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보다가, 입을 천천히 열어왔다. 

 

 

  '청가람 맞지?'

  '뭐?'

  '너 이름 청가람 맞잖아.'

 

 

  뭐가 그렇게 어색한건지 순간 동그랗게 토끼 눈이 돼서는, 그 자그마한 입을 꾹 다물며 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생각해보니 그때의 너만 해도 자연 갈색을 띄는 머리를 하고, 어디서 난건지 신기할 정도로 너와 잘 어울리는 검은색 고무줄로 꽁지를 질끈 묶고 다녔었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평소에는 느낄 수 없는 분위기를 폴폴 풍기고 다니는 청가람에게 놀랍게도 빠져버린 것 같았다. 졸린 눈을 반쯤 감고 수업시간에 입에 펜을 물고는 멍하니 창문 밖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이나, 교문 앞에 서 있는 선도부의 시선을 빠져나오자마자 마치 불편해서 죽겠다는 듯 목에 대충 매여진 체크무늬 넥타이를 벗어젖히는 모습이 꽤나 내 흥미를 가득 채운듯싶었다.

 

  나는 왼쪽 손목에 차여진 두꺼운 메탈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옥상 위에는 고요한 침묵만 존재했다. 너는 꽤나 여유로운 표정으로 난간에 한쪽 팔을 삐딱하게 기대고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치 할 말이 있으면 어서 지껄이고 꺼지라는 눈빛을 보내는 모습에, 나는 교복 마이에 두 손을 찔러넣었다. 그리고 예상 밖으로 나보다 너가 한발 빨리 너 전학생, 주은찬이지? 라며, 입을 열어왔다.

 

 

  '왜? 너도 혹시 소문을 들은거야?'

 

 

  나는 결코 예상하지 못한 너의 물음에 말을 잠시 멈추고 팔짱을 낀 너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가소로운 표정을 짓고는, 연신 언젠가 곧 돌아올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한번 대줄까?'

 

 

  그리고 너는, 스스럼없이 나에게 질문이 아닌 '제안'을 던져왔다. 꽤나 얼굴이 굳어져 당황해 하는 내 모습이 재밌는 듯 너는 조소를 이따금씩 흘렸다. 표정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말을 잃은 나를 이제 대놓고 비웃는 너의 모습이, 평소 아침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고급스러운 차에서 내리는 또 다른 너의 모습과 순간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그 흔히들 아는 비싼 외제 차에서 항상 피곤한 표정으로 발을 디뎌 내리곤 했었지. 그리고 운전석에는, 나이가 아주 많은 중년의 남자들이 항상 앉아있곤 했다. 지금까지 내 두 눈을 무시하며 너가 아니라고 줄곧 생각해왔었는데, 정말 청가람 네가 맞았구나. 이제 머릿속 안에 얽혀진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정리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서야 나른한 표정을 짓고 지그시 너를 바라보았다.

 

 

  '아니, 됐어. 애초에 내 목적은 그것도 아니었고, 아무나 몸을 섞고 싶진 않아.'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제안을 거절했다. 너는 나의 예상치 못한 태도에 꽤나 흥미를 잃은 듯 표정이 약간 수그러들었다. 다시금 입을 꾹 다물며 사나운 두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만둬. 왜 도대체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슬금슬금 너의 신경을 긁는 내 문장들이 정말이지 화가 솟구치는 듯, 너는 고개를 획 돌려 시선을 멀리 던지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주머니 속에 구겨 넣은 담배를 꺼내려는 듯 손을 집어넣었지만, 이미 다 비었는지 작게 욕을 읊조리며 텅 빈 담뱃갑을 꺼내 들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버렸다. 나는 그저 묵묵히 너의 행동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빨갛게 물든 너의 아랫입술이 보이고, 이어서 고개를 빳빳이 들어 올려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너, 처음이지만 되게 재수 없다.'

 

 

  너는 옥상바닥에 곤두박질쳐진 담뱃갑을 발로 짓밟으며 살심이 끓는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너가 느끼는 나에 대한 첫인상은 그야말로 '오지랖 대단한 개새끼'에 불과했었다는걸 내가 기억 하고 있다는 것을 너는 과연 알고 있을까. 

 

 

 

 

 

  옥상에서의 첫대면이 꽤나 신랄한 탓에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이후로, 너는 노골적으로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매번 학교에서 잠만 자고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던 내가 쉬는 시간에 너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도 못 들은 척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항상 너가 점심시간에 아무도 없는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 뒤따라가 말을 걸으면 난간에 기대어 눈을 감고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곤 했다. 이렇게 대우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너에게 말을 걸고 귀찮게 하니 급기야 도대체 자신에게 이렇게 해서 얻는 게 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너가 눈앞에 선연하다. 그에 나는 뭐라고 대답을 했더라.

 

 

  '그냥. 너가 계속 눈앞에 밟혀서.'

 

 

  ,라고 비슷하게 씨부렸던 거 같은데. 나조차 너의 질문에 급 의아해져서 그저 생각을 머릿속에서 한번 거치지도 않은 채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말들을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너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물끄러미 날 바라보다가, 이렇게 대답을 해왔지.

 

 

  '나 같은 애 눈앞에 밟혀서 좋을 거 하나도 없을 텐데.' 

 

 

  껄끄러운 미소 아닌 미소를 머금으며 너는 내 말에 쉽게 반박을 해왔다.

  그리고 옥상에서 보는 너의 모습이 우습게도 고등학교에서 보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시기가 가을에 들어서는 늦여름이었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해가 조금 더 빨리 저무는 계절. 이제는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어 와 창문을 꽉 닫고 1분단인 아이들이 자리를 바꾸자며 담임에게 조르던 그 시기에, 너가 존재했던 1분단 맨 뒷자리는 항상 주인을 잃은 채 텅 비어있었다.

 

  처음에는 원체 학교를 제때 나오지 않는 너라서, 아무 걱정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오늘은 학교에 안 나올 생각인가 보다, 오늘은 조금 지각인가보다 라고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너는 며칠이 지나도, 몇 주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 수업시간에 기지개를 켜며 문득 너의 자리로 눈길을 돌리면,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는 빈 의자때문에 마음 한켠이 쓸쓸해져서 차마 고개를 돌리며 무시할수가 없었다. 이유는 본인도 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그 독한 담배를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던 너의 손끝부터 한 번쯤 만져보고 싶었던 갈색빛의 꽁지머리까지 너무나도 선연하다는 감정이 든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이후로 방과 후에 야간자율학습을 건너뛰고 너를 찾으러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너가 항상 등교하기 전에 비싼 차에서 내리는 좁은 골목도 확인하고, 밤에는 어지러운 빛깔들의 간판이 나열되어있는 번화가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새벽에 너가 모르는 사람과 모텔에서 걸어 나올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모텔촌 주변에 있는 벤치에 앉아 너를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번번이 허탕을 치곤 했다. 새벽에는 너와 전혀 닮지 않은 풍만한 가슴을 내놓은 여인들만 가운데에 술 취한 남자에게 팔짱을 끼고 걸어 다닐 뿐이었고, 너와 비슷한 체격에 특유의 앙칼져 보이는 얼굴을 닮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너의 얼굴을 더는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점점 더 초조해져만 갔고, 한편으로는 이런 곳에서 너를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사실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모든 게 모순덩어리였던 것이었다.  

 

  결국 나는 말도 섞기 싫은 담임을 직접 찾아가 너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지만, 본인도 아는 사실이 하나도 없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뱉어냈다. 은찬이 너 가람이랑 친하지 않았니? 선생님보다 너가 더 잘 알겠다, 얘.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듣기 싫었음에도 나는 다시 한 번 너의 집 주소와 전화를 물어서 개인정보를 메모지에 적어놓았다. 가람이 걔랑 혹시 만나잖니? 이제 며칠 동안 나오지 않으면 퇴학이라고도 전해주렴. 대충 되지도 않는 맞장구를 쳐주며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는, 고약한 향수 냄새 때문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서 재빨리 빠른 걸음으로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정말이지 학생을 포기한 학교라는 타이틀이 붙을 정도로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터치를 안 한다 해도, 어떻게 자신의 반 학생이 몇 주 내내 등교하지 않는데 연락 하나 해보려 하지 않는 걸까. 무능한 선생들과 무능한 학교였다. 도대체 이런 곳에 뭐 한다고 다닌다는건지, 순간적으로 확 자퇴해버릴까라는 혹한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무언가를 꾹꾹 하염없이 억지로 눌렀다. 씨발. 저절로 욕이 터져 나왔다.

 

  담임에게 어찌어찌해서 결국 얻어낸 너의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한 손에 꽉 쥐고, 나는 방과 후 곧바로 너가 사는 동네를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이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대부분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들이라 그런지,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낡은 집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잠시 시선을 멀리 던지며 가만히 서있던 나에게 가차 없이 내릴 거면 어서 내리라며 윽박 지르는 버스 기사 때문에 발을 디뎌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왔다. 매연을 뿜으며 저 멀리 가버리는 마을버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낡은 집들 사이사이로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언덕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어서 그런지 밥 짓는 냄새가 코끝을 찔러오고, 좁은 마당에서 줄넘기하는 아이들도 있는 둥 어찌 됐든 사람은 사는 동네 인듯싶었다. 43번지. 한참이나 위로 올라가야 될 듯 싶어서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고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올라오는데 시간을 얼마나 소비했는지 너가 사는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숨을 고르며 시선을 멀리 뻗으니, 낡은 벽돌로 지어진 작은 옥탑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주변에는 언제 물을 줬는지 모를 이미 말라버린 식물이 담긴 화분이 여러 개 나열되어있었다. 또한 깨져있는 문 유리창을 박스테이프로 대충 붙여놓고, 칼바람이 들어오는 입구의 빈틈은 오래된 신문지로 마구 구겨 넣은 모양이었다. 불이 꺼져 있어서 잠시 고민을 하다가, 주먹을 쥐고 작게 문을 두드려보았다.

 

 

  "...청가람,"

 

 

  역시나 아무 대답이 없는 건너편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혹시라도 문을 안잠구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손을 뻗어 손잡이를 돌리는데, 놀랍게도 곧바로 돌아가는 문고리에 나는 한발짝 안으로 몸을 들이 섰다. 청가람, 나는 또다시 한 번 더 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캄캄한 방 안에서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어둠 아래에서 벽을 더듬으며 불을 켰다. 예상은 대강 하고 있었지만, 눈을 몇 어번 깜빡이며 정말 정리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방을 보니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갈아입은 옷은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고, 언제 벗어놓은건지 모를 잔뜩 구겨진 교복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항상 라면을 끓여 먹은 듯 라면봉지는 구석에 놓여있는 검은색 봉투에 대충 넣어져있었고, 주변에는 스프가 쏟아져 바닥에 말라붙어 남긴 자국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정말이지 난장판 이 자체였다. 며칠째 여길 들어오지 않았던 걸까. 잠시 물끄러미 방 안을 둘러보다가, 순간 익숙하지 않은 작은 정사각형의 무언가가 구석에 쏟아져 있는 것이 무섭게도 눈에 들어왔다.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다가, 앞에 다다라 무릎을 꿇으며 그것을 손으로 집어 들었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이건 콘돔이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마냥 정신이 혼미해져서 괜히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저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와서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거칠게 뒤로 쓸어내렸다. 정말 사실이었구나.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신경이 쓰여서, 매번 바뀌는 운전석의 중년의 남자들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확신을 갖지 못하고 항상 제자리에 맴돌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모든 것이 확실해져서, 나와는 아무 관계도 아닌 너를 향해 분노가 치솟았다. 너는 분명 또 조소를 지으며 어김없이 입에 담배를 물겠지. 이것 봐봐. 나 같은 애 눈앞에 밟혀서 좋을 거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말했잖아. 깔깔거리는 너의 환청 소리가 귓가를 파고드는 것 같아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잠시 휘청하는 몸을 제대로 일으키고 너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 집을 나가려는 순간, 밖에서 차의 크락션 소음이 크게 들려왔다.

 

  신발을 급하게 구겨 신고 옥탑방에서 뛰쳐나오듯이 걸어 나왔다. 집 안에서 얼마나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던걸까, 밤은 이미 깊어진지 오래였다. 너의 집 앞에는, 아까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저번에도 본 기억이 있는 시동이 꺼진 외제 차가 아무렇게나 주차되어있었다. 점점 더 가까이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겨갔다. 헤드라이트도 꺼진 채 어둠 속에서는 아무도 없는 듯 보였지만 미세하게 움직이는 차의 미동에 나의 심장박동수는 귓가에 들릴 만큼 더 커져만 갔다. 터져버릴 것 같은 가슴을 내버려두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선텐이 되어있지 않은 운전석 창문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어둠 속에서 익숙해지는 두 눈에 점점 더 눈을 부릅뜨고 엉켜있는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애써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나도 모르게 눈앞이 까맣게 점멸되어 손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차의 문을 확 열어젖히고, 저 두 사람 중 한 명이 너가 아니기를 믿고 싶었던 작은 희망을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동시에 그 사람 위에 올라타 있는 너를 내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머리가 듬성듬성 나 있는 중년의 돼지가 소리를 꽥 지르며 발가벗은 자신의 밑을 애써 가리고, 잠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까지 상황파악이 안된 듯 장발의 머리를 풀어헤친 너가 놀란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옷은 조수석에 다 벗어놓았는지, 멍해져 있는 너를 내 등 뒤에 세워놓고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젖히고는 너의 어깨를 급하게 감싸주었다. 살심이 끓는 목소리로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돼지 새끼를 향해 썩 꺼져버리라며 격분이 가득 담긴 고함을 외쳤다. 그러자 차 문을 급하게 닫아버리고는 이리저리 정신이 없는 듯 차를 박으며 멀리 빠져나가 버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몇 분간 침묵이 흘렀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희미하게 떨리고,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너의 숨소리를 듣고 있다가 너의 손목을 낚아채는 것과 동시에 뒤를 돌아 집을 향해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야, 야! 주은찬! 손목이 잡혀서 이도 저도 못하는 너는 그저 소리를 지르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듯 연신 몸을 버둥거리며 꽉 쥐어진 손아귀를 반대편 손으로 주먹을 쥐어 내리치기만 할 뿐이었다.

 

 

  "너가 뭔데! 너가 뭔데 내 삶에 참견이야!!"

 

 

  너를 좁은 집 안으로 끌어들인 후에 겨우 놓아주고, 잠시 뒷걸음질 치는 동시에 벌겋게 부어오른 자신의 손목을 감싸며 기어이 너는 나에게 원망이 담긴 분을 토해냈다. 그리고 집 안의 불빛에 의존하여 너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너의 모습에 당황 해서 그저 너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항상 질끈 묶어져 있던 작은 꽁지머리는 내려 어깨에 차분히 내려와 있었고, 밝은 쉐도우를 바른 듯 너의 눈가 주변은 반짝거리며 시야를 자극했다. 너는 립스틱에 의해 붉게 물들여져 있는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며 증오와 경멸이 덧입혀진 두 눈으로 쏘아보기 시작했다.

 

 

  "이제야 만족하니? 내가 이렇게, 너 앞에서, 내 자존심의 밑바닥까지 보여줘야 해?"

  "......"

  "도대체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게 뭐가 있길래 나한테 이러는 건데..."

 

 

  금방이라도 묽은 무언가가 흘러내릴 것만 같아서, 너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며 너의 표정을 철저히 감추었다. 검은 그림자가 너를 뒤덮었다. 나는 잠시 몸 옆에 가만히 내려놓은 팔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격양되어있는 어깨 위에 나의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너가 내 눈앞에 밟힌다고 그랬잖아."

  "......"

  "절절하게 고백이라도 해줄까."

 

 

  그리고 너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 자신도 내가 왜 지금 이렇게까지 너에게 집착하는지도 전혀 이유를 모르겠고, 그저 아까전 너의 모습을 보면 머리꼭지가 돌아가 버릴 것 같은 좆같은 기분만 생생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길도 없고, 돌리기에는 너무 시간이 늦어버렸다. 

 

 

  "지금 너한테 말하는 거 웃기긴 한데, 내 아빠라는 개새끼는 술 쳐마시다가 죽어버렸고, 입에 담기도 싫은 엄마라는 작자는 다른 씨발새끼랑 바람나서 집 나갔어."

  "......"

  "나는 돈도 없고, 할 수 있는 건 너가 아까전에 본 그것뿐이야. 이렇게 살지 않으면 나에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없어,"

 

 

  너는 울분을 토해내며 마치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주먹을 쥐어 내 가슴을 마구 치기 시작했다. 너를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갑자기 비집고 들어온 너가 증오스러워, 한 마디 한 마디 밖으로 새어 나올 때마다 너의 갈색의 머릿결이 이리저리 얼굴선을 타고 흔들렸다.    

 

 

  "이래도 날 책임질 수 있어? 너가 뭔데?"

 

 

  나는 딱히 해줄 말도, 답변도 할 수가 없었다. 나와 몇십 년을 함께 해온 왼쪽 손목에 차여진 메탈 시계가 온몸을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너의 경직되어있는 어깨를 나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맞닿은 온도가 참으로 뜨거웠다. 너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바로 귓가를 파고들어 오고, 나의 냄새가 배어있는 점퍼를 걸친 너의 등을 차분히 토닥여주었다. 너의 얼굴 뒤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당장 손 앞의 내일은, 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혼란스럽게 해서, ...미안."

 

 

  그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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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버스

*캐붕주의

 

 

 

 

 

  활짝 열려진 창 밖으로부터 바람에 의해 날라온 푸른 잎사귀가 톡, 하고 책 위로 떨어졌어. 턱을 괴고 앉아 한참이나 생각에 빠져있던 왕세자는, 고운 연둣빛의 잎사귀를 손을 뻗어 쥐어보았지. 뚫어져라 그것을 바라보다가, 눈알을 굴리며 제 앞에 놓여져있는 책을 멀리 밀어놓았어. 며칠전부터 복잡하게 하는 여러 생각들때문에 머리를 지끈지끈거리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내일까지 완료해야하는 과제에 집중이 전혀 되지 않았지. 몇시간동안이나 왕세자 수업을 받고, 산떠미처럼 쌓인 책을 더 읽어야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것만 같았어. 재미도 없고 흥미도 없는 이런 것들을 밀어놓고 어서 빨리 궁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 분명 또 수업이 끝나면 누나에게 받는 교육도 있어서 한참이나 시간을 까먹을텐데, 자신의 하루일과를 머릿속에서 주욱 나열하니 정말이지 왕세자를 때려치고 싶었어. 이제 곧 19살이 되고, 이어서 20살이 되면 왕의 즉위를 물려받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이 생활을 끈질기게 해야되나도 싶고. 창밖으로 보자니 날씨도 좋고, 날씨가 좋으니 밖으로 어디 정원이나 그런데로 놀러가고 싶고, 문득 체격이 작은 그 선비님이 생각나고, 그 하얗고 작은 손을 붙잡고 거닐고 싶기도 하...

 

 

  "아."

 

 

  어린 왕세자는 불현듯 머릿속에 파파박하고 나타난 그 선비님때문에 모든 행동을 멈췄어. 그리고 며칠전부터 자신의 머리를 아프게 했던 그런 생각들의 주제가 얼굴 고운 선비님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지. 그래, 자신의 누나를 따라 그 마을을 방문하고 그 선비님을 봤을때부터 자신의 머릿속안에서 놀랄정도로 섹스하고싶다는 욕망이 불타올랐었어. 심지어 그 선비님이 오메가라는 것을 눈치챘을때는 그 어느때보다 신이나서 예전에는 꺼내보지도 않는 최음제의 효과를 띄고 있는 입자를 꺼내들어 억지로 먹였던 기억이 났어. 왜 그랬을까. 수많은 오메가들을 거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선비님, 청가람-은 정말이지 자신을 성적으로도 미적으로도 끌리게 하는 묘한 특징들이 많았어. 천한 신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우같은 두 붉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살인적인 눈빛들이나, 항상 먼저 다리를 천박하게 양옆으로 벌려오며 자신을 유혹해오던 다른 오메가들과는 달리 엄청나게 몸부림을 치면서 거부하는 모습이 묘하게 흥분감을 돋게 만들었지. 이 정도가 되니 자신에게 지금까지 숨겨진 변태 기질이 있었나, 라는 생각까지 들정도였어. 그 부드러운 갈색빛 뒤통수를 부여잡고 거칠게 부드러운 입술을 맞대오면 발버둥치는 모습이 거부감은 커녕 자신의 쾌감을 더욱 치솟게 만들었지. 정말 점점 미쳐가는건가. 왕세자는 제 앞에 펼쳐져있던 책 위로 얼굴을 묻으며 털썩 쓰러졌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요즈음 유독 바빠진 일정들 때문에 얼굴 한번 보지못한 선비님의 모습을 떠올려보다가 어서 마무리 짓고 자신의 궁궐로 돌아가고싶다는 생각에 힘을 내어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어.

 

  방 안은 고요했어. 왕세자가 몸을 살짝 움직일때마다 부스럭거리는 관복의 소리가 스쳐가고, 이따금씩 열어놓은 창 밖으로부터 기분 좋은 바람만 솔솔 불어왔어. 또다시 시선이 팔려 다시금 턱을 괴고 창 밖을 바라보았지. 짹짹거리며 넓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참새 두쌍이 시야에 들어오고, 다시 한번 구름 한점 없이 푸르른 하늘이 보였어. 그리고 조금 시선을 낮추는데, 뭔가 익숙한 옷차림새가 보이는거야. 점심도 끝났을 때여서 지금 이 시간대의 궁궐에서는 돌아다닐 사람이 없을게 분명했어. 허리를 펴고 살짝 이마로 내려온 앞머리를 뒤로 넘겨버리고 두 눈으로 알수 없는 그 사람을 향해 시선을 쫓았어.

 

 

  "궁녀?"

 

 

  머리를 곱게 하나로 땋고, 나비모양의 연분홍색 비녀를 꽃은 그녀는 분명 제 두 눈이 틀리지 않았더라면 왕세자빈의 궁녀임이 틀림없었어. 저 비녀는 세자빈을 모시는 증표로 무슨 일이 있더라고 꼭 머리에 꽃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게끔 해야했거든. 그런데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거야. 이 시간에 도대체 무슨 일이지? 거기다가 표정은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듯 무척이나 어두워보였어. 주변을 살피며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바삐 가는 모습도 역시 꽤나 수상해보였지. 왕세자는 한참이나 이걸 어떻게 하나 곰곰이 생각에 잠긴듯 보였어. 그리고 몇분이나 멍하니 초점을 잃은 눈으로 궁녀의 뒷모습을 쫓다가, 뒤로 벌러덩 등을 뻗고 누워버렸지.

 

 

  "아, 설마 별일 있겠어..."

 

 

  역시나 왕세자는 아직까지 18살의 '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톡톡히 증명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였어.

 

 

 

  문득 머릿속에 번쩍 튀어나온 가람의 얼굴에 한시라도 늦출수 없다며 다시 몸을 일으켜 열나게 과제를 시작한 어린 왕세자는 저녁이 저물때쯤이나 모든걸 끝마쳤어. 녹초가 된 몸을 이끌며 누나를 만날때도 기진맥진한 상태였지. 오죽하면 보약이라도 지어먹으라는 소리나 들었으니까 말이야. 아무튼 최대한 빨리 하루일과를 끝마친 왕세자가, 왠일로 오늘은 섹스가 아닌 함께 식탁에 앉아 저녁이라도 먹을 생각에 들떠있을 바로 그때였어.

 

 

  "...저하,"

 

 

  자신의 궁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바로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 들어왔지. 콧소리가 잔뜩 섞인 하이톤의 여자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왔어. 왕세자는 두어번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아무 대답도 없이 제 갈길로 발걸음을 다시금 옮기기 시작했지. 마치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듯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여인은 살짝 자존심이 상한 모양인지 제자리에 우뚝 서서는 왕세자의 뒷통수만 뚫어져라 노려보고만 있었어. 그래도 나름대로 예의나 옛정이라는걸 아는건지 왕세자도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왔지. 살짝 불어오는 저녁 바람에 왕세자의 잿빛의 머리켤도 함께 자연스럽게 따라왔어. 꽤나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뒷편에 서있는 여인을 연신 삐딱하게 바라보았어. 그리고는 한참이나 무표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어왔지.

 

 

  "내가 여기로 찾아오지 말라 하지 않았나?"

 

 

  말 한마디에 칼바람이 불듯 마디마디가 뚝뚝 끊어지는듯 했어. 정말이지 엄청나게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서 얼굴을 맞대는듯했지. 여인은 아름다웠어. 또렷하고 깊은 검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나며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지. 머리를 하나로 정성스럽게 틀어 올리고, 화려하고 큰 의상을 몸에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우아한 바디라인이 뛰어나 보였어. 거기다가 상대방은 매혹적인 잿빛 머리에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남자였지. 이렇게 고혹적인 두 얼굴을 맞대고 있었지만, 둘은 서로에게 암묵적인 혹독한 박해를 가하고 있었어. 서로에게 마치 무슨 앙금이 쌓인듯한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지. 그리고 이 눈빛으로 왕세자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왕세자빈'만 존재할 뿐이었어.

 

 

  "당신의 아내입니다. 그리 쉽게 끊어질 인연일줄 아셨습니까?"

  "여긴 왜 온거지?"

 

 

  왕세자는 돌아가는 길에 방해자를 만났다는 듯 꽤나 퉁명스러운 얼굴로 지금 바쁘니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라는 말을 뱉었어. 세자빈은 한참이나 의미심장한 얼굴로  자신의 어린 남편을 바라보다가, 결심한듯 입을 열어왔지.



  "요즈음 들리는 말에 대해서 직접 들으러 왔습니다. 그 오메가는 도대체 누구의 출처이더니까?"

  "오메가?"



  왕세자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문득 생각이 떠오른듯 알수 없는 표정으로 왕세자빈을 바라보았어. 혹시 무슨 해코지를 한건 아니겠지. 이 여인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고, 언제든지 실행시킬수 있는- 평범한 여자는 아니였어. 왕세자는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그 선비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건 아닌지 괜스레 초조해져서 한 발자국 그녀를 향해 걸어갔어.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세자빈을 노려보기 시작했지. 그에 그녀는 자신은 아무것도 잘못한게 없다는듯 아주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어.



  "그리고, 저를 밀어내고 그 천박한 것을 세자빈으로 책봉하실거라는 소문을 직접 들었습니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이지요?"

  "아니다. 그 소문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는 얘기다."



  그러자 왕세자는 고민을 할틈도 없이 부정했어. 천박한 것이라니. 자신의 인내심을 살살 긁고 있는 저 계집이 점점 꼴보기 싫어졌어. 아무리 그녀의 양반집안이 그렇게 명문이고 유명하다 해도 이렇게 기어올라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지. 처음에는 시집오기 그렇게 싫다며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준수한 외모를 확인하자마자 혼례에 승낙한 사실을 못본척 할수 없었지. 그런데 지금 이 계집이 방금 예비 왕세자빈에게 천박한 것이라고 욕보였단 말이지. 안그래도 오늘 예쁜 선비님의 생각에 물들여서 하루를 보냈는데, 저 계집이 뭔데 감히 내 귀중한 소유물에 손을 뻗냐 이 얘기야.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아서 지금 당장 중앙의 궁궐로 돌아가 혼례서를 한조각도 빠짐없이 불태버리고 싶었지.



  "지금 당장 맨발로 쫓겨나기 싫으면 그런 단어는 삼가도록."

  "지금 단어가 문제이십니까. 저하는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정말 모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세자빈 역시 한계라는듯 언성이 높아졌어. 거기다가 그녀가 여자이긴 했지만 우성 알파의 신분를 지니고 있어서 서로를 눈빛으로 찢어발기며 으르렁 거리는 모습이 꽤나 살벌해 보였지. 그렇게 개와 고양이처럼 불씨가 붙을락 말락 하고 있는데, 멀리서 왕세자의 누나인 왕비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늦저녁을 맞아 잠시 자신의 궁녀들과 산책을 나온 모양이었지. 눈치빠른 세자빈이 먼저 목소리를 흘겨듣고, 시선을 멀리로 뻗어왔어.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왕세자를 바라보았지.



  "...오늘은 늦었습니다. 다음에 이어서 얘기하도록 하지요."



  오늘은 타이밍이 조금 좋지 않다는 듯 어깨에 걸쳐있던 남색빛깔의 너울을 뒤집어 쓰고는, 왕세자의 마지막 대답을 듣지도 않은채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궁으로 되돌아 갔어. 어이도 없고 기가 차서 한참이나 어린 왕세자는 제자리에 서있었지. 하긴 자신보다 두살이나 더 많은데다가, 여자 정신연령은 나이보다 몇살은 더 높다고 하잖아. 아무리 똑똑하고 제 할일을 다 한다쳐도 발버둥쳐봤자 세자빈은 왕세자의 머리꼭대기에 서서 내려다볼 정도였지. 그게 세자빈과 왕세자의 차이점이였어. 그래서 그런지 왕세자는 왕세자빈의 뒤를 돌면서 살짝 지은 미소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듯 보였지. 아주 작게, 누군가를 비웃는듯 조소를 머금은 그런 표정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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